“통일의 거담 담론,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1)”
“통일의 거담 담론,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1)”
  • 최성달 (시인)
  • 승인 2016.01.06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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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난 불평등의 정의’라는 통찰력으로 추진해야 한다
[시사논단] - 최성달 (철인/시인)

<<역사의 변동과정>>

1. 서설

통일적 접근 방식은 현실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일면 현실을 넘어 역사를 바라볼 줄 알아야 길이 보인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역사의 길로 들어서면 길을 잃어버린다. 현실이 쌓여서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 이야기지만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가장 궁금했던 것이 과연 대북정책을 누가 조율, 건의하고 집행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대북 정책을 컨트롤 했다고 여기는 쪽에서는 물론 어떤 원칙 하에서 남북관계를 이끌어갔다고 주장하겠지만 일반 국민이 느끼는 감정은 그 시기에 대북 정책이 과연 존재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로 남북관계는 긴장과 경색의 반복이었다. 특히 이 시기는 그전 10년 간 진보정권이 이룩한 유연한 흐름이 다음 정권 5년 안에서 어느 정도 시스템적 안착을 이룰 수 있는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그동안의 흐름을 역으로 돌린 정책적 근시안은 어떤 면에서 역사의 단죄가 필요할지 모를 만큼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들은 더 깊숙이 들어갔어야 했다. 더 깊숙이 들어가서 그전보다 훨씬 많은 의약품과 생필품과 농기구를 지원했어야 했다. 보수정권이 갖는 국방에 관한 안정적 기반을 바탕으로 진보정권이 이룩한 성과보다 더 깊숙이 북으로의 경제적 침투를 했더라면 남북관계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위치에 서 있을 것이다.

그 같은 아쉬움은 보수정권을 이어받은 박근혜정부에서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원활한 남북관계를 이어가고 통일을 앞당기는 데는 하나의 대원칙이 서 있어야 한다. 외교적으로는 북한이 가장 갈망하는 미국으로부터의 정권을 보장받고 국제사회로 나가는 길을 터주어야 한다. 북의 위협이 강해지는 것은 국제적 고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를 우리가 앞장서서 해소해 주는 것이 대한민국의 안전을 지키는데도 훨씬 유리한 전략이다. 그 바탕 아래 남북 간에는 우리가 더 많이 경제적 물자를 지원하는 정책을 꾸준하게 밀고나가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향후 통일 비용을 절감하고 남북의 격차를 해소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통일의 최대 악조건이란 이러한 대전제가 정권의 기호에 따라 냉탕 온탕을 반복하는 것이다. 매번 대북정책이 보수 진보에 따라 180도 달라져 주변국과 당사자인 북한이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모르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답답한 상황에서 통일적 접근에 있어 제 세력들에게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쓰여 졌다. 사상적 측면에서 볼 때 하나의 사상이 집필되는 동기는 어떤 변화가 이루어 진 뒤에 그것을 비평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하여 의미를 담아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사회변동요인을 제공하기 위해 저술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글은 말하자면 의도성에 있어 후자에 속한다.

환원하면 로크의 ‘정부론’에서 개진된 정치사상이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미국이 모국인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할 수 있는 이념적 토대가 되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통일적 여건의 성숙이 더디게 느껴지고, 사람들 가슴에 명확한 지표가 상실되어 우왕좌왕 할 때, 통찰력이 결집된 방향성의 제시는 흩어진 역량들을 한 곳으로 모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 힘은 다시 사상과 결합하여 하나의 도도하고도 거대한 흐름이 되어 새 역사를 열어가는 지평으로 승화되는 기제로의 작용을 역사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인류의 보편사 구조로 남북한의 제 모순을 해체시키고 새롭게 구성하려고 해도 실제적으로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 보편사에만 한정되거나 어떤 특수한 구조가 실제적으로 보편사를 넘어서 현실로 건재함을 수 없이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자체적으로 한계를 안고 있다면 뒤엉킨 문제를 풀어내는 방편이 보편사가 되는 것은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내가 보편사를 끌어들여 반통일의 기운을 제어하고, 현실에 봉착되어 꼼작하지 못하는 시스템을 붕괴시키려고 하는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북한사회를 일방적으로 해체하려는 의도는 사상적 접근에서부터 미로에 봉착하게 되어 있다. 북한사회가 남한보다 더 공정하지 못하고 불평등하다는 사회라는 것을 논증하고 규명하고자 가령, 롤스의 ‘정의론’을 덜 먹인다 해도, 공정과 불평등 삶의 조건들은 남한 내부에서부터 위기에 직면하게 되어 있다. 이 문제는 롤스의 정의론에 단초를 제공했던 로크, 루소 그리고 칸트의 사상을 모조리 동원한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이것은 전략과 방편에 더 치중된 아주 특수화된 시스템에 대한 접근임을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변동이 단기적이고 일시에 일어나기도 하고, 때론 장기적인 힘들의 투쟁에 의해 변화를 열어가기도 하지만,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하고 있다. 사상의 힘이란 그 변화를 축적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실제적인 기득권을 해체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본다. 총체적 민의라는 것도 기실, 개인 정체성, 또는 주관성의 집합체이며 복합체라고 봤을 때, 집단의 사고를 수정하는 그 중심에 사상이 존재해야 함을 믿는다. 사상이란 원래, 누적된 불만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집단의 환각을 풀어주는 매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예시의 힘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나아갈 방향에 대한 해답은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축적된 힘이 폭발성으로 나아가는 기저에 사상은 뇌관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력의 재편에서 사상의 무기를 장전한 병사들이 확신에 사로잡혀 원하는 세상을 구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은 칼 마르크스가 구현하고자 했던 세계, 다분한 의도성으로 접근했던 명확한 목표들과 무척이나 닮았다. 다만, 다른 점은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상으로 창조된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으나 나의 사상은 순전이 전략 방편적으로 통일을 위한 성격으로 말을 한 까닭에 한시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역사가 삶의 반영이라고 보았을 때 아무리 내가 방편적으로 사상을 개진했다고 해서 그것이 통일 후에 사회를 규정하는 데 전혀 무익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삶의 질이 결정되는 체제의 성격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실상 그 무엇과도 바꾸거나 견줄 수 없을 만큼 최고의 가치가 된 지 오래다. 애국심만으로 국민들에게 그 무엇을 강요할 수 없고 삶의 질과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민을 떠날 수 있는 여건들이 마련되어 있는 다원화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래 세대에는 인종, 민족적 국경이 사라지거나 많이 약화될 것이란 전망은 상당한 근거와 설득력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를 감안한다면 무작정 통일지상주의를 부르짖는 것이 세계사의 조류와 역 방향일지 모른다. 그러나 통일의 성격은 포괄성 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지역에 국한된 협의의 사안이라고 해도 반통일이 적대시, 경쟁, 무력의 기반 위에 놓여 있다면 반드시 해체하여야 하는 시대적 사명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로 파악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포괄성의 당위나 명분을 넘어선 평화의 개념이요, 진정한 삶의 질에 대한 진지한 접근으로 모색되어야 한다.

2. 반족의 시스템화

우리가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를 돈독하게 해야 하는 배경에는 외교 군사적 이유 말고도 경제라는 아주 기본적 시스템이 공고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이라도 서로를 외면하는 순간 내부적으로 심대하고도 중대한 위기에 봉착할 수 있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경제의존도가 유럽에 비해 미국, 일본, 중국에 치우쳐져 있는 까닭에 경제구조를 다각도로 재편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 나라와의 미편한 관계는 국익에 서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기본인식, 즉 공동인식이 있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북한과 주고받을 경제구조의 연결성 내지 의존도의 공고성이 강할수록 통일은 멀지않은 시기에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다는 전망은 허언만은 아닐 것이다.

한 예로 레비스트로스가 기행문학으로 집필한 ‘슬픈 열대’에 브라질 원주민들의 생활상 중 반족에 관한 이야기야말로 우리가 벤치마킹해야 할 통일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은 북한의 정신적 주체성 및 강점이 남한 사회에서 거부할 수 없는 대의나 명분, 정서적 자부심으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북한사회 내부에서 남한의 경제적 물질적 풍요를 이룬 문화 축적의 힘이 자연스럽게 수입될 때 통일은 상부의 이해관계 없이 이뤄지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통일의 최대 걸림돌은 삶의 질과 정신을 지배하는 관념의 세계가 양립하여 합쳐질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지지만 핵심과 중심에서 통일을 가로막은 적은 상부의 이해관계이다. 특히 북한 내부의 사정이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한 또한,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에 맞물려 이를 타개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구조로 묶여 있다. 따라서 이것을 넘어서려면 사상과 철학이 방향을 제시하고 그것을 일반이 주류의 가치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프로그램을 짜고 실현해야 통일비용을 최대한 절감하고 가장 지극히 자연스러운 통일을 완수할 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북한 정권과 정권을 받들고 있는 주민들을 만족시키는 방안이란 무엇일까? 해답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그들에게 자부심을 안겨주는 것이다. 통일 이후에도 북한 주민의 자부심이 유지되고 전승 계승된다는 믿음을 주어야 북측의 불안 요인을 상당 부문 제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권 상층부도 불안감 없이 통일에 응하려면 이러한 요건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질 때 가능한 것이다. 통일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우선순위에 있어 통치구조와 이념, 정신적 신념은 통일의 당위성 앞에서 후순위로 물러서게 될 것이다. 이 때가 통일의 최적기다.

3. 물질과 관념의 상호교환

남북한 체제의 장점을 하나씩 크게 대별한다면 남한은 발달된 문명이고 북은 정신적 노작에 의해 이룩한 사상의 성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북한 체제의 합작품이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성과물이기도 한 이 두 요소적 장점은 취합하면 얼마든지 미래세대의 유산으로 남길 수가 있다. 나는 공산주의적 인간의 자본주의에 대한 실험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개인은 전체를 위해 전체는 개인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공산주의적 인간양성의 사상적 토대를 이미 고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불교의 티끌 속에 전체가 전체 속에 티끌이라는 화엄의 논리와의 결합을 도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상적 교류와 결합으로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은 더 새로운 사회, 통일된 조국에서 얼마든지 새로운 이념 모델 또는 통일시대의 사상모델로 비약하거나 전환 창조될 수가 있는 것이다.

미래와 역사로 머리와 가슴, 눈이 돌아가야 새로운 방향이 보이고 제시될 수가 있다. 우리는 지금 현재만 보고 땅만 본다.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아 해와 달이 뜨고 지는 명확한 이치에서 한참 멀어져 있다. 성급하고 감성적인 통일논의와 접근은 금물이라는 허구적 논리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오늘만 보는 자들이다. 현금의 세월에 안주하려는 비겁한 자들이다. 역사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물려줄 땅과 조국에 대해 숙고하지 않는 자들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의 토양 안에서 북의 정권에 의해 고착화한 풍속과 사상 전통 가운데 독창적이고 유익한 것들은 현창하는 방향에서 통일적 접근을 이루겠다는 열린 사고가 태동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김일성이 주창한 주체사상도 예외가 아니다.

주체사상이란 김일성주석이 1967년 12월 최고인민회의에서 발표한 내외정책의 기본방침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정치면에서 자주, 경제면에서 자립, 국방 면에서의 자위를 중심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후에 유일사상으로 천명되는데 수령과 당 인민대중이 삼위일체라는

북한사회에서 사상이 국가 전반을 지배하거나 영향을 미친 경우는 중국을 통한 불교의 전래와 유교의 정착, 그리고 마르크스 레닌주의 보급, 주체사상의 성립일 것이다. 이 가운데 불교는 혁명정신을 해이하게 한다는 이유로, 기독교는 미제의 침략전쟁에 도구로 전락했다는 비판에 직면하여 형식적이거나 거의 해체된 상태다. 현재 북한을 통치하는 이념은 주체사상이며 이것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건설 즉, 막스 레닌주의를 원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문방송이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자들이 사회 각 분야의 나아갈 방향성의 의제를 설정해야 하는 소명을 갖고 있다는 데에도 의견 대립이 없을 것이다. 국민정서라는 미묘한 틀 속에 갇히면 정서라는 것은 언제나 답보나 부동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 이것을 진전으로 이끌어내는 역할을 누군가는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껏 우리는 동국대 강정구 교수가 육이오를 북한지도부가 벌인 통일운동이라는 발언을 두고,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접근법을 문제 삼으며, 이종석 장관의 주체사상 연구를 색깔론으로 뒤집어씌우는 정서적 접근에만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다. 언론과 학자가 정서를 뛰어넘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우리사회는 이것의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국민은 사상의 축적이 없는 상태에서 정서에만 의존하고 있고, 언론과 학자는 그 정서를 핑계 삼아 정서법에 묶여 한발 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상의 축적이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상이란 정서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사상의 자유가 정서와 실정법에 묶여 논의의 장조차 마련되지 못하는 지향의 역사적 가치 의무를 위배하는 것이 된다.

가령 송두율이 북한 사회를 내재적으로 접근하고 이해했다고 해서 외부로부터 북한이 초월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방편일 뿐이다. 통일적 접근에서 어느 것이 더 유리한가를 그윽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모택동이 모순론으로 당정을 장악한 것은 전통적인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아니었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과감하게 텍스트를 교정해가며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가 세계사의 보편적 종교로 대두될 수 있었던 데도 역시 방편이 있었다. 어렵고 딱딱하게 교리를 강독하거나 규율을 강요하기보단 알기 쉽게 접근하기 위해 기존의 신앙들을 차용하는 방편을 택했던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논의에 대해 비판이 있을 수는 있다. 가령, 불교교리 측면에서 세 확장을 하는 데는 기복신앙이 도움이 되겠지만 원초의 텍스트인 무아(無我)를 넘어설 수 없듯, 아니 지향적으로 강을 건너서면 뗏목을 버려야 하듯, 통일론에 있어 이런저런 방편 또한 통일을 이룬 뒤에는 과감하게 버리고 가장 적합하고 이상적인 질서로의 재편을 서두르면 될 일이다.

북한을 남한화하고 남한을 북한화하는 작업에 돌입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라면 등 기호식품의 북한 반입으로 남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소극적 접근에서부터 기계의 지원이나 합작사업을 통해 깊숙하게 남한의 기술과 경제력이 북한 내부에 미치게 함으로써 남한이 없으면 존립이 휘청거릴 때까지 의존성을 높여 나아가야 한다. 슬픈 열대의 저자 레비스트로스가 포착한 반족의 생활 형태에 통일전선에 전략적으로 채택되어야 한다. 완전한 합일로 대상의 대상성이 사라지는 날까지 이러한 형태의 교류가 심원적으로 깊어진다면 통일은 필연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한의 북한 지원이 어느 수준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정주영의 소떼 방북, 현대의 개성공단 사업, 금강산관광 프로젝트, 남북단일팀 구성, 윤도현 밴드와 조용필, 김연자의 평양공연, 중국을 통한 남한 드라마와 제품의 공공연한 유입, 휴대폰의 사용 등 문화 경제적 침투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된다.

북한이 변하지 않았다는 논리는 허구다. 북한은 남한 경제와 문화적 침투 앞에 변화의 기로에 선 것이 틀림없다. 서로의 체제를 인정해주면서 장점을 보호해가면서 통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논리에 이견이 있어서 안 된다. 무엇을 주면 받아내겠다는 논리는 국민정서법에 기댄 아주 유치한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길고도 깊게 볼 수 있어야 한다. 통찰의 문제는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남북 양측의 통일세력이 내재적 모순을 핑계 삼아 혁명이나 폭력으로 한 쪽을 전복하여 통일로 나아가는 길도 모색해 볼 수 있으나 이는 실현 가능성이 적을뿐더러 사회구조 변경에 대한 비용을 계량해 보았을 때 통찰력 있는 방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가 통일이라는 거담 담론에 접근함에 있어 때론, 가장 진정한 형태의 인간조직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황적 접근에 있다. 이러한 논의는 자칫, 통일 논의를 미궁에 빠뜨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포착해야 통찰력은 ‘드러난 불평등의 정의’를 갖고 통일에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드러난 불평등의 정의란 개념은 남북의 장점을 골고루 취합하여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전략이다. 상황적으로 접근을 하되, 남이든 북이든 수용의 부분은 보편사적으로 설득력의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하나하나의 개별적 사안들을 해체적 방법으로 수용해나가야 한다.

가령, 주체사상의 경우, 북에서는 사상과 실천의 양부분에 있어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그 이론이 남쪽으로 오면 비 접근성으로 전락한다. 주체사상에 대한 비토는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있다. 북한에 의해 연구되고, 정치화되었다고 무조건 물리치려는 방식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것이 철학사적으로 해체수용이 가능한 내용이면 발전적으로 승계하는 긍정적 수용방식을 택해야 한다. 사상이라는 것은 후학에 의해 조망되고 비판되는 축적의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세계(사상)가 출현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사상의 제약은 전혀 무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냥 내버려두고 적극적으로 수용해도 통일된 새 나라에서 얼마든지 역동적으로 새로운 구축이 일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제 더 이상 마르크스 엥겔스와 레닌주의가 아니다. 그렇다고 모택동주의에 의해 구축된 체제가 아니다. 공산주의라는 원형에서 이미 탈피하여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독특한 나라다. 원형은 간작되어 있으나 전략적으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원용했다는 점에서 모택동이 이들의 주의(主義)를 차용하여 상황에 맞게 변형시킨 것에서와 동일한 점이 발견되는 어떤 주의 즉, 주체사상주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체제의 변동, 그보다 협의에 있는 정권의 이어짐 측면에서 도올 김용옥이 간파한 조선의 역사와 이승만의 정권의 역사가,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이승만 정권은 6.25때 끝장났어야 했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를 한다. 마찬가지로 더 나아가 북한 정권은 인민의 굶주림을 해결해주지 못했을 때 끝장났어야 했다고 누군가 말했다면 이 말에 대해 역시 전적으로 찬성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역사는 이어짐 속에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상으로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사실 직시하는 문제는 통일 논의에 있어 당위에 앞선다는 전략적 사고가 주문된다는 사실, 또한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간과해서 안 된다는 것을 미리 말해두고자 한다.

북한 정권이 대화의 상대로 또는 현실적 무력의 상대로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 실체를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야 그 다음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지 무작정 쓸데없는 대의나 명분, 그 보다 더 한심한 것은 현재의 것을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의 발동을 변동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지했으면 한다. 통일은 정말 우리의 현재 조건과 바꿀 수 없다는 고착화된 논리의 우위는 정말 잘못된 의식의 발로이자, 경도된 지향이 아닐 수 없다. 통일적 접근이 그 어떤 하류, 우선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생각은 경직된 사고, 변화를 막아서려는 집단에 의해 주입된 집단최면이다. 통일의 가치는 정말이지 우리의 전부를 걸고서라도 추구해 볼만한 거대 담론이다. 더 나아가 필연의 법칙에 지배받는 당위의 역사다. 그걸 부인하도록 내버려 두어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통일은 곳곳에서 암초를 만나 좌초하고 있다. 통일의 최대 적은 이러한 왜곡된 인식을 주입식을 심어 집단 간의 위화감과 불안을 조성에 성공했다는데 있다.

통일은 외부의 충격이나 내부의 돌발변수에 의해 즉각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이러한 방식대로 진행된다면 긴 시간적 인내를 요구한다. 실제적 통일 의식으로의 진입은 김대중의 6.15선언 이후다. 김대중의 통일방식을 계승한 노무현 정권을 거쳐 소극적 규모의 인적 물적 교류의 1단계를 지나, 2단계는 남측 양측의 필요성이 더욱 공감되는 시기를 거쳐 절대적 필요성이 제기되는 3단계를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 최상의 이상적 모델이다. 기실, 지금껏 이런 단계를 거쳐 통일된 나라는 없었다. 체제를 달리하지만 동일한 외양과 언어, 역사를 공유한 집단끼리의 전면적인 교류는 통일적 바람이라는 국민들의 숙원에 복종하여 필연적으로 하나로 통합되는 역사성을 요구받게 되어 있다.

사회적 역사적 변동이란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이뤄진다. 첫째, 관념에 의한 변동이다. 가치관, 지향, 삶의 자세가 사회적 변동을 일으킨다. 이념이 사회가 총체가 될 때 가장 큰 변동이 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으로 물질적 생산에 의한 총체에서 사회적 변동요인이 도출된다. 즉 마르크스 엥겔스가 말하는 생산 활동이 변동요인에 위치해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가장 큰 변동요인은 교류와 접촉에 의해 변동이다. 생물에 있어서 접촉과 교류는 적응이라는 강한 인자를 만들어내고 사회적 접촉은 발전이라는 변동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교류와 접촉이 사회변동의 가장 큰 요인이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을 한다. 선교에 의해 오늘날의 기독교가 정착되었으며, 강제적 접촉인 전쟁에 의해서도 문화가 전파되고, 기술이 이전되었으며 자발적 문명의 교류는 새로운 세상을 대면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남한을 수정된 자본주의 체제로 정립하고, 북한을 수정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체제로 만들면 된다. 이 같은 진행은 영향과 필요성 그리고 교류에 의해 실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필연의 과정 위에서 대두된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진행되고 잇는 것들이다. 다만,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방향과 체제의 정향에 관한 논의들이다. 인류전체라는 대명제 하에서 공동적 이익을 위해 문명의 상위 국가들이 하위 국가들에게 해야 하는 어떤 의무를 남한 측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통일이 전개되어야 한다. 물론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남한 위주와 주도의 통일을 명명하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지만 그런 뜻의 전개를 위해 내가 이 말을 끌어들인 것은 아니다. 거대사(巨大事) 다시 말해 지구라는 인류 전체가 직면한 문제, 가령, 기후변화, 환경오염, 인구증가, 기술의 성장(살상무기 및 복제 등 생명공학의 제 문제들)등 위기문제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주도적 위치에 있는 나라들이 의제설정에서부터 스스로의 희생, 해결의 비용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전제의 해결을 도모하듯 남북한의 통일 또한, 남한 필요불가결한 희생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말은 다른 각도에서 논구하면 남한이 통일비용의 부담을 수용해야 한다는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독일통일처럼 서독중심의 흡수된 방식에서도 이것은 확실하게 드러난다. 잘사는 쪽이 못 사는 쪽에 손을 내밀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에게 공동의 이익을 도출하는 방식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또 다시 남북한 문제에 있어 현시점에서 남한의 자세나 태도에 대한 일러둘 점은 정방향에 대한 프로그램이 빈약하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대일 방식의 주고받는 식의 상술적 접근이 아니라 무한대로의 확충이 이 경우에 더 적절한 방식이 될 수 있다. 북한이라는 다른 한쪽은 남한의 잃어버린 실재다. 그것이 자기실현이라는 환상으로 표현되어도 전혀 손해가 없는 또 다른 자기의 표현이라는 개념의 도출이 필요하다. 내재적 접근을 넘어 철학적 심리학적 동일시 개념을 차용해도 그렇게 나쁜 결과를 낳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의 모델은 베트남의 전형도, 독일의 전례도 아니다. 이것은 새로운 모델이다. 남측양측이 절대적 또는 절박한 필요에 의해 구축되는 상황이 가장 이상적이다. 지금 남북의 상황은 어느 일방이 가령, 이탈리아의 통일처럼 가리발디가 일방적으로 양보하여 통일이 이뤄지듯 한쪽의 일방적 양보로 성취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명확하게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대 국가의 통합인 것이다.

따라서 통일이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다음 몇 단계의 원칙이 확인되어야만 한다. 다음 몇 가지의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삶의 조건을 확대되고 성공적으로 안착이 되는 것이다. 첫째, 권력으로부터의 불안의 제거다. 둘째, 참여로부터의 불안의 제거다. (정치, 사회조직에 능력에 의해 자유롭게 진출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주어져야 한다.) 셋째, 생존으로부터의 불안의 제거다. (통일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정서가 확산이 있어야 생존불안이 사라진다.) 넷째, 과거로부터의 불안의 제거다. (통일되기 전의 일들에 대해 불문에 붙인다는 명확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

북한과 남한이 합쳐지는 세계는 삶의 조건이 변형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해도 불안하거나 불리한 조건은 형성되기 어렵다. 불리한 조건이 되려면, 그것은 실제적으로 더 좋은 집에서 하루 밤을 자면서 익숙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매일 지내면 불안한 조건은 사라지게 되는 것과 같은 수준의 불안이 있을 뿐이다. 큰 불안의 요소가 남북 양측에 동시에 남아 있는 것은 아직 교류가 덜 진전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무력적 불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어야 한다. 군대나 경찰, 또는 권위적 기관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가시적 조치가 필요하다. 군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인민대중의 적이 될 수 없으며 총구를 인민을 향해 겨눌 수 없다는 원칙이 확인되어야 한다. 남북이 합쳐지는 조건들을 수용하는 인민 대중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조직이라는 신뢰를 심어 줄 수 있어야 권력의 불안으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다.

외세가 개입되지 않은 개입할 수 없는 여건이 조성될 수 있다면 이는 최상이 아닐 수 없다. 아마 단언하건대, 남한의 상황이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도 거역할 수 없는 흐름조차 그들이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최상의 방안은 도도한 흐름을 만들어나가는 의지와 자세가 통일의 관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관념을 통해 지향할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이 이 때문이라도 시급하다.

♦ 최성달 (철인/시인)

남북 양측의 구조는 어느 정도 반족의 형태로 들어서고 있다. 때문에 누군가 북한이 변하지 않는데 우리만 변하면 손해라는 개념은 어린아이의 유치한 사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교류가 시작된 이상 그것도 문화와 언어 역사적 배경이 동일한 집단끼리의 교류가 어느 한 쪽이 변했는데 상대가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논리일 뿐 아무런 인과성을 구성하지 못한다. 주변인을 양성하는 문화적 힘을 길러야 한다. 북한과 남한이라는 이질적이면서도 공동체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내부의 힘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양쪽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 그러면서 어느 한쪽에도 소속되지 않은 경계인 디아스포라 양성에 주력해야 한다. 조선인이라는 추상성에서 구체적인 통일의 주관성을 발견하는 지혜로운 한계인이 사회내부에 주류로 등장하거나 비축된 힘을 추동하는 세력으로 대두될 때 비로소 사회변동 요인으로서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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