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무심한 날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매미들이 울어댔는데 귀 기울여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가끔 벤치에 나가 앉아 너거 거기 있었구나. 그나마 다행이다 한 것이 전부입니다. 아마도 한여름의 태양보다 더 무겁고 무더운 삶을 살아내느라 여유가 없었던 거겠지요. 불과 일주일도 안된 일입니다. 어느 저녁 바람이 마음을 바꾸고 서늘한 기운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한 순간 얼굴을 바꾸고 계절은 가고 오는지요. 아침저녁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언제나 이맘때면 편지 한 장을 썼다는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이 편지를 쓰고 나면 내 삶도 조금은 서늘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날부턴가 뉴스를 보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니 독일에 있던 작은아이가 전화를 걸어 “엄마,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모든 신문이 도배를 했어. 진짜 쪽팔려 못살겠어.” 했던 날 부터인 거 같습니다. 그 아이 이름이 누리인데 ‘새누리당’이라고 당명을 바꾼 날은 얼마나 방방 뛰던지....얼마 후 성추행 사건으로 그 당이 ‘성누리당’이란 애칭(?)을 얻었을 때는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아이 성이 창녕 成가거든요. 사랑이 많은 세상이 되라고 큰아이는 다솜, 작은아이는 누리라고 이름을 지었더니 그 아름다운 이름을 욕보이고 있는 무리들이 있어 본의 아니게 작은아이에게 미안했습니다. 신문과 방송을 모두 장악하고 말도 안 되는 논리로 국민들을 희롱하는 국민희롱당 그네들 때문에 뉴스를 보지 않은 그날부터 속 시끄러운 일은 여실히 줄었습니다.
뉴스를 끊고 나서 페이스북에다 소소한 일상을 써서 올리며 지냈습니다. 대여섯 명에서 많으면 스물 남짓 좋아요를 눌러주고, 간혹 댓글을 달아주는 페친들 덕분에 견뎌냈던 시간입니다. 애써 나 자신의 마음에만 집중하고, 아주 개인적인 것들, 제 감정만을 써서 올려댔더니 페친 한 분이 ‘어쩌려고 그렇게 적나라하게 감정을 드러내느냐’고 걱정스레 물으셨습니다. ‘원래 페북이 일기 써서 올리라고 만들어놓은 공간 아니냐’고 너스레를 떨며 넘겼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무엇인지 무엇을 걱정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세태를 걱정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글들을 써서 올려도 모자란 시간에 지극히 개인적인 슬픔과 고통 속에 빠져 보는 사람들도 걱정시키고 있는 제가 참 한심해 보였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눈 감고 귀 막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페친들이 올려주신 이야기를 읽으며 속으로 속으로만 분노를 삭이고 있었습니다. 내 삶도 감당하지 못해 비겁했다고 고백합니다. 그저께 강변에서 행사를 하는 선배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어떤 선배랑 막걸리 한 잔 했습니다. 그 분이 “정 선생이 촛불집회에 나오면 참 재미있겠다.” 생각했다고 말을 건냈을 때 얼굴을 지나 심장이 화끈 거리는 걸 느꼈습니다. 몹시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일은 그만해야겠습니다. 결국 살아내는 일 밖에 할 게 없는 사람이 무기력하게 앉아 우울한 감정에 자신을 맡기는 일도 그만하겠습니다.
‘누구답다’라는 말이 참 부담스러웠습니다. ‘정순임이 답지 않게 왜 그러냐’는 이야기를 들은 날은 자괴감에 빠져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못 나고 허우적거리는 날도 있지....어떻게 맨날 나답게만 사느냐’고 벽에다 대고 고함을 치면서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이제 인정하려고 합니다. ‘정순임이 답다’라는 이미지는 내가 살아오면서 만든 것이니 그것을 지키면서 살아내는 일이 삶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적어도 내가 만들어 온 이미지가 부정적인 것이라면 ‘답지 않게 왜 그러냐’고 질문하지 않았을 거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내 모습으로 살아내 보겠습니다.

한 여름 뙤약볕에 조금은 여문 것 같지요? 겉과 속이 다르고, 자신을 잘 숨기고, 진실에 눈감고, 아부 잘하는 사람을 철들었다 하는 세상이 싫어 죽는 날까지 철들지 않고 살겠다 작정했는데 그것 또한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였는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철드는 일이란 본래 절기에 따라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한 것이니 철없는 시절은 낭패인 게지요. 철들어 갈 작정입니다. 더 부지런해지겠습니다. 한숨과 눈물 대신 매일 아침 현관문을 열고 부딪치고 깨지면서도 웃고 행복하겠습니다. 정순임이 답게 살아내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코스모스 핀 길을 함께 걸어 줄 그대들에게 약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