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대한민국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 유길상 기자
  • 승인 2013.05.0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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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경상북도 독립운동가

경북도에서는 매월 경북의 자랑스런 독립운동가를 한 분씩 선정하여 시․군 및 보훈단체, 교육청 등에 공훈자료를 배부하여 애국정신 함양과 경북의 정체성 재확립에 앞장서고 있다.

  ▲ 석주 이상룡 선생
이 달의 경상북도 독립운동가는 안동출신이며,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애국지사가 선정됐다. 석주 이상룡 애국지사는 1858년 안동에서 태어나 1932년 5월 12일 중국 길림성 서란현에서 75세에 순국하셨으며,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해골을 고국에 싣고 돌아가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대한협회 안동지부 조직, 협동학교 설립, 만주지역 민주정부와 군관학교 설치, 부민단 조직, 대한독립선언서 서명 발표 등의 공적으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으며, 지난 1992년 5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 51년(1894~1945년)을 고스란히 간직한 안동은, 한국독립운동의 발상지로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서훈자 348명과 자정순국자 10명을 배출한 성지로서, 2007년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여 전 국민의 나라사랑 정신함양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공적 개요>

이상룡은 1858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상희(象羲), 호는 석주(石洲)이며, 만주에 망명하면서 상룡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김흥락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익힌 그는 1895년 의병이 일어날 때 상을 치르느라 직접 의병에 뛰어들지 못하고 의병장인 외숙부 권세연을 도왔다.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기자 그는 의병에 직접 나섰고, 가야산 기슭에 의병기지를 건설하려고 거금을 투입했지만 일본군의 공격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1908년부터 그는 서양의 서적들을 읽으며 혁신유림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안동 내앞마을에 세워진 협동학교를 지원하고, 1909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만들었다. 그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국민이 모인 ‘정당’으로 해석하고, 나라의 주인이 ‘민’이라는 사실을 천명했다. 그리고서 안동 청년들을 모아 정치운동을 펼치다가 구금되기도 했다.

나라가 망하자 그는 혼인으로 연결된 가문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서간도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독립운동 조직인 경학사의 초대 사장에 뽑힌 그는 남만주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계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신흥강습소를 열고 이를 신흥무관학교로 발전시켰다. 동포들이 만주족의 간섭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중국 당국과 협상하고 만주의 옛 주인이 한민족임을 밝혀 자긍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는 경학사만이 아니라 다양한 조직을 만들어 동포사회를 만들고 독립운동의 교두보를 확보해 나갔다. 광업사(廣業社)·자신계(自新稧) 등이 그런 조직이고, 부민단扶民團은 형식적으로 자치정부의 형태를 지녔다. 이것이 1919년 3・1운동 후 한족회로 확대 발전하였다. 한족회는 민정기관이고, 이때 만들어진 서로군정서는 군정기관이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과 능력은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초대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시키고 개헌하여 국무령제를 채택했을 때, 이상룡을 초대 국무령으로 추대한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한번 기울어버린 임시정부를 쉽게 되살리기 어려웠고, 이상룡은 1926년 2월 국무령 자리를 물러나 만주로 돌아왔으니 69세 고령이었다. 그리고서 6년 지난 1932년 5월 12일, 그는 길림성 서란현 소과전자에서 75세에 순국하였다. 이상룡의 삶은 두 가지 면에서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사상적인 면에서 보수성과 진보성을 아우른다는 점이다. 전통유림으로 성장하였지만, 혁신유림으로 전환하여 진보성을 보였고, 만주에서는 마르크스의 이론마저 공자의 대동사회로 해석하여 민족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독립운동계가 좌우 분화로 고민할 때 그는 오히려 통합의 길을 제시하였다. 둘째,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민족의 제단에 바쳤다. 최고의 수준에 이른 학문과 많은 재산, 가족들의 편안한 삶도 모두 한 순간에 다 버렸다. 오로지 나라와 겨레를 위한 길에 모든 것을 바친 것이다. 가진 자, 배운 자의 역사적 책무를 말하려면, 석주 이상룡의 삶에 꼭 견주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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