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지는‘소리의 빛’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지는‘소리의 빛’
  • 유응오 불교투데이 편집장
  • 승인 2009.03.18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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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


자연과의 합일 일깨워주는 심우도 영화

"모든 존재는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의 <묵화>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를 본 직후에는 그저 가슴이 먹먹하기만 했다.

그런데, 며칠 후 길을 가다가 문득 노인이 소의 코뚜레와 워낭을 끌러주는 영화 장면이 눈앞에 스쳐갔고, 그러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워낭소리>는 천천히 꼴을 되새김질 하며 먹던 소의 그 그렁그렁하고 큼지막한 눈망울을 담은 영화다. 그리고 <워낭소리>는 소의 걸음처럼 노인의 걸음처럼 그 감동도 늦게 전달되는 영화다. 간단히 줄거리를 살펴보자.

얼굴에 밭고랑 같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있다. 노인은 어릴 적 침(針)을 잘못 맞아 신경이 다친 뒤부터 다리를 전다. 그런데도 노인은 평생 그 불편한 다리로 땅을 부치며 살아왔다. 그렇게 슬하의 9남매를 키웠다. 팔순을 눈앞에 둔 노인에게 벗해줄 이는 온종일 잔소리를 하는 아내와 소밖에 없다.


영화 속의 소는 소의 수명으로 치자면 노인만큼이나 늙었다. 대개 소의 수명이 15년인데, 이 소는 무려 마흔 해나 살았다. 이 소가 노인에게는 자가용이자 밭을 가는 농기구이자 말벗이기도 하다. 노인과 소의 대화는 대개 말없이 이뤄진다.

3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함께 하다 보니 둘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관계가 돼 서로 눈빛만 봐도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노인은 귀가 잘 안 들리지만 희미한 소의 워낭소리만은 귀신같이 알아듣는다. 아내에게서 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소에게 먹일 풀을 베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소 역시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도 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산 같은 나뭇짐도 마다않고 나른다.

노인에게는 소가 자기분신이다. 더는 쓸모가 없어졌다고 판단해 우시장에 내다팔려고 하지만, 노인은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온다. 애초 팔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노인은 새로 산 암소가 늙은 소를 뿔로 받으며 먹이를 독식하는 것도 못마땅하다. 그래서 종종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여물통 앞에 가서 암소를 막대기로 때리기도 한다. 노인과 소는 늙고 병들었다는 점에서 같다.

늙은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노인은 병원을 간다. 질주하는 차 사이에서 천천히 걷는 소의 걸음은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의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노인이 늙은 소에게 심한 애착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 이상 자신이 쓸모가 없어졌다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 평생 동안 흙을 파고 살아온 노인과 늙은 소는 비록 이 산업사회에서 경제성이 매우 떨어지는 존재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둘의 삶은 숭고하다. (마치 영화 <워낭소리>의 미학이 그런 것처럼.)

지난해의 최고 이슈는 미국 소고기 수입 재개로 인해 불거진 광우병 논란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올해는 기축년 소의 해이다. 영화 <워낭소리>의 성공은 이런 시의적인 부분이 없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피켓 시위를 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통해 미국 산 소고기 수입 문제를 거론하기도 한다.

감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도 실은 자연을 떠난 삶과 자연과 합일된 삶의 대비였을 것이다. 이는 수레 가득 나뭇짐을 끌고 오는 소 옆에서 노인이 지게에 수북하게 나뭇짐을 짊어지고 오는 장면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렇게 고단한 노역을 함께 나누며 노인과 소는 평생을 함께 걸어왔던 것이다.

불가에서는 예부터 깨달음의 과정을 소를 제재로 한 우화인 심우도를 통해 에둘러 말하곤 한다.


심우도는 소를 잃어버린 목동이 다시 소를 찾는 과정을 그린 10폭의 그림이다. 심우도에서 소는 깨달음이면서 목동 자신이다. 그걸 깨달아가면서 목동은 인우구망(人牛俱忘, 소도 사람도 다 잊다), 반본환원(返本還源, 근원으로 돌아가다), 입전수수(入纏垂手, 저자에 들어가 중생을 돕다)의 단계를 거쳐 비로소 절대무의 경지에 이른다.

<워낭소리>는 기술만능 시대에 ‘반본환원(返本還源)’, 나를 잊어야 본래의 나를 볼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인간중심적 사고를 버려야 본래의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을.

영화의 압권은 노인이 더는 일어설 줄 모르는 앉은뱅이가 된 소의 워낭을 풀러주는 장면이다. 노인의 손길은 가슴에 치미는 슬픔으로 떨린다. 자신과 소의 인연을, 끝내는 자신의 삶과 세상의 인연을 자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워낭소리는 엄밀히 말해서 사라지는 소리이다.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지는 소리는 이명처럼 들릴 듯 말 듯하지만, 그래서 더욱 또렷하게 가슴에 각인된다.

소의 목에 걸린 워낭이, 상여가 나갈 때 울리는 종소리로 환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살아 있는 동안 음악소리를 낸다. 별빛처럼 시리도록 아프고 아름다운 소리를…….

시간 순으로 보자면, 노부부가 봉화 청량사를 찾는 게 가장 나중일 것이나, 영화 속에서는 첫 장면으로 배열했다. 거기서 노인이 무엇을 기원했을지는 눈이 어두운 관객일지라도 대번에 알 것이다.

유응오 기자는 1972년 충남 부여 출생이며, 대전대 정치외교학과와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불교신문>, 2007년 <한국일보>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됐다. 2007년 신정아의 박사 학위가 조작됐다는 것을 최초로 보도해 한국불교기자협회 대상인〈선원빈기자상〉을, 2005년 영화를 불교사상으로 해석한〈시네마 서방정토〉기획기사를 연재해 한국불교기자협회〈특별상〉을 수상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증언을 토대로 10.27 법난을 역사적으로 규명한 [10.27 법난의 진실](화남출판사, 2005)을 펴냈으며, 이 시대 대표 스님 18인의 출가기를 엮은 [이번 생은 망했다](도서출판 샘터, 2007)를 엮었다. 공저로는 외국인 스님들의 출가.수행기를 묶은 [벽안출가](도서출판 샘터, 2008)와 콩트집 [초중딩도 뿔났다](화남출판사, 2008)가 있다. 현재 인터넷신문 <불교투데이>[http://www.bulgyotoday.com ]편집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불교투데이에 연재되고 있는  '시네마인다르마' 를 저자가 경북in뉴스의 뉴스연대 취지에 동의해 2차 게재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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