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설레는 발걸음으로 - 소풍
⑤ 설레는 발걸음으로 - 소풍
  • 김윤한
  • 승인 2009.03.16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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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한의 추억마당

소풍 전날의 설렘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지만)적 우리의 일상은 매일매일 책보자기를 싸서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따분한 일상 외에는 일년 내내 거의 특별한 일이 있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즐거운 일은 소풍과 운동회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소풍이나 운동회 날이 정해지면 우리는 매일매일 손을 꼽아가며 그 날을 기다리곤 했다.

특히 소풍 전날은 더 했다. 다음 날 소풍을 갈 생각에 밤에는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지난 해 소풍을 갔던 기억이며 올 해 소풍을 가서 친구들이랑 모처럼 맛있는 것도 먹으며 즐겁게 노는 상상을 하다가 밤이 늦어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소사와 구렁이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가 가장 기대하고 고대했던 소풍날이나 운동회 날에는 자주 비가 왔다. 소풍날 비가 오면 자연스럽게 소풍은 취소되고 책보를 싸서 학교에 가야 했다. 그 씁쓸한 기분이란…

학교 선배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로 우리 학교가 행사를 할 때마다 비가 오는 것은 아주 오래 전에 이 학교에 근무하던 소사(학교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고용인)가 어느 비 오는 날 커다란 구렁이를 잡아 죽여서 그 죽은 구렁이가 소풍날이나 운동회 날만 되면 비를 내리게 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알고 보니 주위의 어느 학교라도 모두 이와 비슷하게 소사가 구렁이를 잡아 죽인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는 거였다.

소풍가는 길

소풍 날 아침 작은 빗방울이 떨어지다가 학교에 갈 무렵이 되어 그치면 참으로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싸 준 도시락과 삶은 달걀, 사이다를 함께 산 보자기를 들고 학교로 갔다.

그리고 평소에는 쌀밥도 구경하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소풍날은 보리쌀을 조금만 넣은 쌀밥을 먹을 수 있는 일년에 몇 안 되는 날이었다. 대신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꽁보리밥을 드셨겠지만.

학교에서 학반별로 줄을 서서 소풍을 떠나는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아이들끼리 장난을 치며 걷다가 희디흰 캡 운동모자를 쓰고 목에 호루라기를 건 예쁜 여선생님께 꾸지람을 듣기도 했지만 기분이 나쁠 정도는 아니었다.

길가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고 먼 데서는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봄소풍 날이면 아지랑이가 발 아래로 피어오르고 먼 곳에 보이는 강물 빛은 왜 그리도 눈부시게 반짝였던지.

즐거운 먹을거리와 놀이

그 때 소풍 가서 먹을거리는 과자류는 돈을 주고 사야 했으므로 많이 귀했고 주로 흔한 것은 고구마나 감자, 달걀, 땅콩 따위였다. 그렇지만 그런 먹을거리들도 평소에는 마음대로 먹기 어려운 귀한 것이었다.

우리가 주로 소풍을 가던 곳은 낙동강 변에 있는 백사장이었다. 강가에는 기다랗게 언덕이 있었고 그 아래는 왕버들이며 수양버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그 아래는 아주 보드라운 모래들이 꿈결처럼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그 때는 소풍을 가서 특별한 놀 거리도 마땅치가 않았다. 담임선생님과 학생들이 빙 둘러 앉아서 수건돌리기를 했다. 둘러앉은 아이들 뒤로 술래가 빙빙 돌다가 수건을 한 사람 뒤에 놓으면 다시 그 아이가 술래가 되는 그런 놀이였다.

술래가 되면 대신에 벌로 노래를 학 곡씩 해야 했는데 기억나는 것은 ‘엄마가 섬그늘에~’나 ‘올해도 과꽃이 피이었습니다’같은 노래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아주 귀했지만 건전지를 넣은 핸드마이크라도 있으면 그것은 참으로 대단히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우리가 수건돌리기를 하며 노는 사이 선생님 한 분은 종이에 상품명과 도장을 찍은 종이를 나무 아래쪽에 감추어 두고 수건돌리기가 끝나면 이를 찾도록 했다. 보물찾기 놀이였다.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면 서로 먼저 보물을 찾으려고 일제히 우루루 달려갔다. 백사장에 엎어져 우는 아이들도 많이 있었다. 보물을 적은 종이를 찾아오면 그 쪽지에 적혀 있는 대로 상품을 주었다. 대개가 공책이나 연필 따위였지만.

가난했지만 순박했던

요즈음 아이들도 소풍을 가겠지만 옛적처럼 4~5 킬로미터나 걸어서 가는 경우는 거 의 없고 버스나 열차를 이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소풍을 간다고 해서 평소보다 더 나은 먹을거리를 먹는 것도 아니고 소풍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재미있는 일도 없다고 한다. 평소에 컴퓨터나 폐쇄된 인터넷 오락에 물든 아이들이 소풍을 통해 그렇게 큰 감돌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소풍을 간다고 해 봐야 먹을거리 몇 개 외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어쩌다가 소풍을 간다고 해서 장날 새 옷을 사 주시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새신을 사든 그대로 신든 남녀 학생 모두가 검정 고무신이었고 옷은 대개가 옥양목으로 지은 옷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은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해 얼굴에 허옇게 마른버짐이 핀 아이들도 많았다.

얼마 전 여행 중에 옛날 사이다라는 것을 파는 것을 보았다. 알싸한 맛이 수십 년 전 수풍 갔을 때 그 맛이었다. 문득 어릴 적 소풍 갔을 적 생각들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그 시절, 비록 가난하고 남루했지만 한없이 소박했고 순수했다. 요즘 아이들과 달리 모든 것이 귀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어려운 추억들이 더욱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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