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깎는 혁신만이 진보당 살 길'
'뼈깎는 혁신만이 진보당 살 길'
  • 유경상 기자
  • 승인 2012.05.07 1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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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혁신없는 공학적 통합이 불러온 참담한 자화상일 뿐

# 단상1

86년 스물한 살 때니까 어쩌면 옛날이야기이다.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사회과학 서적을 전부 다 읽고 싶었지만 당시 도서관에는 신간서적이 없었다. 읽으려면 선배에게 빌리거나, 서점에 가 돈을 주고 사야 했다. 서점 할인가격이 대략 4천원부터 6천원 쯤 했던 것 같다. 비빔밥 한 그릇이 천원 안팎이었던 시절이다 보니 몇 권의 책값을 감당하기에는 호주머니가 너무 가벼웠다.

겨우 책값을 모아 책을 사러 갔을 때다. 그런데 함께 간 몇몇은 책을 훔쳐서 나왔다. 상당한 혼란을 느꼈다. ‘나도 그렇게 할까’ 순간 유혹이 일렁거렸지만, ‘왜 훔치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변이 가관이었다. ‘이 책을 읽고 민중을 위해 투쟁하는데 쓰면 된다’는 것이었다. 난 ‘안 된다’고 반박을 했다. 수단이 공정하지 못 하면 언젠가 정신의 뿌리까지 부정이 스며들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써클(동아리) 선배에게 문의를 했다. 이런 풍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던 거 같다. 돌아온 답변은 명쾌했다. ‘남들이 그런 짓을 해도 우리멤버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상당히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런 유혹을 느끼는 마음조차도 지워버리라고 말했다.

소위 변혁운동사나 사회운동 논리를 습득하느라 수업을 소홀히 했던 때다. 시험 준비를 소홀히 하게 됐고, 성적이 낮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다른 유혹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위 ‘컨닝’이라는 풍토였다. 지금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대학시절 한 번도 커닝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국어 시험에서는 시험 준비를 전혀 못했었고, 그 결과 백지를 제출해 에프학점을 받은 적도 있다. 차라리 깨끗하게 인정했다. 학점을 다시 취득하는데 고생을 했지만, 목적과 수단(과정)의 관계에 대한 상식은 그랬었다.

군사정권의 폭력과 극심한 억압정책이 스물한 살 대학청년에게 큰 공포감으로 짓눌려 왔지만, 우리는 사회과학 도서를 읽고 토론하며 민주주의는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항거와 투쟁의 신심을 키웠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청춘이었지만 행복했다. 우리는 떳떳했고 명분과 대의를 찾으며 뛰었었다. 남들은 8학기면 졸업이 가능했지만 무려 13학기를 다니면서도 부정을 취하지 않았고, 수단이 정당했었다. 그래서 우리의 20대 초중반은 자랑스럽게 기억되고 있다.

#단상2

세월이 흘렀다. 더디지만 국민이 참여하는 민주정치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 흐름 속에서 진보의 가치를 통해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주창하는 세력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다수의 사람들은 통합진보당을 제 1번지로 꼽고 있다. 지금의 통합진보당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해 뭉쳐진 정당조직이다.

그러나 구성원을 살펴보면 걸어온 궤적과 지향이 조금 다른 연합세력으로 볼 수 있다. 당초 통합진보당의 출범 이전에 진보세력의 대통합 논의가 활발했다. 통합을 통해 대중적 진보정당을 건설해 나가자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진보의 가치를 담아내고 세력의 한계를 극복해 낼 패러다임을 구상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진보의 혁신’을 통한 ‘재구성(통합)’이 이뤄져야 한다는 대명제가 있었다. 그렇지만 제19대 총선을 목전에 두고 내적 혁신의 실천은 부족했고 아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최근 통합진보당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불거져 나왔고, 이제는 아예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있다. 참담한 자화상이 온 국민의 질타로 숨이 넘어갈 지경까지 이르렀다. 최악을 뚫기 위해 차선을 택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 차악을 선택했던 정치적 결정이 또다른 최악을 만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악수(惡手)를 둔 셈이다. 어쩌면 지금의 통합진보당 내부는 선거연합을 위한 조합 내지 공학적인 정당통합의 수준일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이번 통합진보당의 사태는 당연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어쩌면 과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심판대에 오르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선택과 결정으로 87년 6월 이후 25년 진보정치의 성과를 한꺼번에 탕진할 수도 있다는 것에 엄중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때인 것 같다.

혹자는 왜 갑자기 작금의 통합진보당 사태가 수십 년도 더 지난 학창시절의 책 타령과 컨닝 타령과 관련짓는지 의아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자의 눈높이에서 볼 때 서로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수단이 정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많은 당원들이 침소봉대되고 있다고 억울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혹자는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들의 무차별 뭇매가 더 아프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정당정치는 책임의 정치라는 점이다. 어떤 진보의 가치를 지키려고 억울하다는 것인지 가슴으로 되물어 봐야 할 때이다.

당원이 소중하다고 강변하고 있다. 당원이 없으면 진보정당이 없다고 환치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의 분노는 어떻게 가라앉힐 것인지 궁금해진다. 국민의 분노가 보이지 않는다면 이건 정말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분노하는 국민의 바다 위에서 초라한 일엽편주로 떠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황량한 무인도에 가서 열심히 투쟁하고 싶은지 되묻고 싶다. 당원의 권리를 운운하며 그 명예를 팔지 말아야 한다. 상실감을 운운하지 말아야 한다. 이건 부정이다. 부정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 이후에 다음을 모색하는 것이 순차이고 순리이다.

그럼에도 또 수단을 가리지 않고 부정을 지키겠다고 조직원을 모으고 윽박지르는 것이 대세라면 그 조직은 과감히 청산돼야 할 것이다. 청산하겠다는 대오각성이 없다면 희망도 없는 것이다. 결과는 해체뿐 이다. 청산과 개혁이 담보되지 않으면 국민으로 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을 것이다.

앞으로는 진보이고, 뒤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패한 정당으로는 절대 대안정치세력이 될 수 없다. 길고도 오래가는 정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물질이든 정신이든 도려내야 한다. 아파도 도려내야 한다. 더더욱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 과정'을 국민 앞에 당당하게 보여주겠다는 혁신의 정신을 망각한 채 ‘고도의 정무적 판단’이 어떻다는 식의 어쩌구 저쩌구 하지 말기를 간곡하게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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