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곁에 서줄까요’
‘누가 내 곁에 서줄까요’
  • 배오직
  • 승인 2012.04.10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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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나를 미(美)치게 했던 노래-2
신촌블루스Ⅱ의 「바람인가, 빗속에서」-‘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럴 때 누구나 한번쯤 시간의 문턱, 장소의 문턱에다 그물을 던져 과거의 자신이 무엇이었으며, 지금 어떤 모습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사랑이 사건으로 격하되고 누군가 옆에서 내가 살아온 만큼의 세월을 말해준다면 ‘잉게보르크 바흐만’「소설가, 1926-1973」을 떠올려야 한다.


완고했던 내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목격했던 때도, 비를 맞고 서 있는 여인을 돌아서게 해야 했던 모진 시절도, 오마주의 대상이 세상을 떠난 상실감에도 어김없이 바흐만을 떠올렸다.


모두 서른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후 십여 년 동안 바흐만의 책속 대상은 책 밖에 있다고 믿었고 습관적으로 행했던 일상적 일탈 속에서도 나는 애써 미리 쳐 둔 그물을 끌어 올리려 하지 않았다.


그저 사는 일에 익숙해져 작은 권력을 탐하며, 하고 싶은 일보다 내세우는 일이 더 좋았기에 자기 합리화와 투사라는 방어기전을 습득해 나 자신을 보호했었는지도 모른다.


바흐만은 말한다. 어느 누구도 싱그러운 계절이 내일이면 끝이 난다고 미리 말해주는 사람은 없다고.
일본사는 한국인으로 바둑을 잘 둔다는 조치훈은 한수에 온 몸을 걸었고 소극장 공연 천회를 돌파하고 세상 떠난 김광석이 그랬다. 할 수만 있다면 매일을 돌아보는 자성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말이 다소 무거워졌다. 이 글은 어느 한 시점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를 좋아했던 노래를 소개하면서 그려보고자 한다. 지난 호에 실었어야 했던 머리글로 대신한다.

찢어진 문풍지 사이로 아직 겨울바람이 차다. 햇살은 낮고 길게 드리운다. 덮고 있던 두터운 담요가 펄럭이자 고운 입자들이 어느새 한방 가득 떠돈다.


그날도 「불티」에서 기타 치는 친구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음악 듣는 일은 혼자 보다 둘이 제격이다. 특히 음악적 취향이 비슷한 사람과 교감은 행복 그 자체다. 학교 공부보다는 음악 듣는 일이 더 좋았던 90년 고3 겨울은 한 장의 LP가 나를 사로잡았다. VIP-20074(동아기획)가 선명히 찍혀있는 검은색 바탕에 온통 붉은 글씨로 채워져 있는 음반, 바로 신촌블루스 2집 앨범이었다.


당시에도 지금과 같이 온통 발라드나 댄스음악이 한국 대중가요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시절, 외국 유명 밴드의 뮤직비디오나 국내에선 발매가 되지 않는 해적판 음반을 들으며 음악적 소양을 키웠던 시절이었다.


지금 K-POP이 서태지에 의해 시작되었다면 수면 아래에서 소수 마니아층이 즐겼던 블루스 음악의 대중화는 단연 신촌블루스의 몫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촌블루스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서울 신촌 근처에서 블루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일종의 프로젝트 밴드로 초기 엄인호, 이정선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고 지금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그때그때 참여하여 음반을 만들었다.


총 9곡이 수록된 이 2집 음반은 지금 들어도 다양한 레퍼토리가 존재한다. 락 블루스, 소울, 보사노바, 레게, 퓨전재즈, 정통블루스 등 이 한 장의 음반에 모든 블루스 넘버가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중 앞면 두 번째 음악으로 「바람인가 빗속에서」는 개인적으로 자주 듣는 음악이다.


김현식과 엄인호가 주거니 받거니 함께 노래한 이색적인 곡으로 흡사 「블루 아이드 소울」의 명수 「라이처스 브러더스」를 연상케 하는 수준 높은 곡이다.(앨범 재킷 소개 글 중) LP를 틀면 언제나 빗소리가 들린다. 틈 사이 먼지들이 만들어 내는 아날로그적 소리는 향기에 가깝다.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향기가 없으면 뭔가 부족한 것처럼 말이다.


기타를 쳐본 사람은 알 수 있는데 코드를 옮길 때 마다 나는 소리가 있다. 예전 누군가 이 소리를 없앤 기타를 만들었지만 실패했었다고 한다. 뒷면 마지막 곡인 「루씰」 은 엄인호가 가장 존경한다는 전설속의 블루스 대가 「B.B. KING」이 치던 기타의 애칭이다. ‘그의 작은 손짓에도 온 몸을 떠는 바닷속의 고요. 그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네’ 라고 고백할 정도로 엄인호는 「루씰」을 예찬한다.


지금은 복개되어 더 이상 둑이라고 불리지 않지만, 복주여중을 끼고 흘렀던 둑길에서 시작해 가로수들이 듬성듬성 줄지어 있었던 강변까지 걸으며 「불티」의 무명 기타리스트와 함께 엄인호가 되고 김현식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서울로 오입(?)가자는 결의를 매번 다지면서 서로를 격려했었다. 그러나 그해 나의 오마주 김현식은 세상을 떠났고 엄인호는 실의에 빠져 한동안 기타를 치지 않았다. 이듬해 무명의 기타리스트와 나는 대학에 가기로 했다.

「잔뜩 찌푸린 날, 한 잔의 커피와 B. B. KING의 음악이 아쉽다. 너무 변해버린 이 거리에서 가끔 내 머리 속엔 블루스가 그려지고 잊혀진다」-엄인호-

「매운 담배연기, 푸르스름한 암전, 그리고 술과 외로움에 취해버린 나. 젖은 눈빛을 술잔에 빠뜨린 여인, 그러나... 사랑할 수도 없는데 이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나 보다」-김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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