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1991년부터 고교입시 부활을 검토하라는 노태우 정권의 지시에 따라 평준화는 해체의 길을 걷게되고, 문교부(현, 교육과학기술부)는 ‘대도시는 평준화를 계속 적용하고, 소도시는 지역실정과 지역 여론을 수렴해 결정하되 춘천, 원주, 이리, 천안은 평준화의 존폐 여부를 교육감에게 일임’했다. 이에 따라 군산, 목포, 안동이 1990년에 비평준화로 돌아섰고, 순천, 원주, 익산은 평준화가 해제된다. 평준화 해체에 맞서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은 함께 싸웠고 특히 전교조는 평준화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웠다. 이에 반해 관변단체와 보수교원단체들은 평준화 해제를 위해 나섰다.
이후 침체기를 맞았던 평준화 운동은 군사독재의 잔재가 사라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던 김대중 정부부터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2000년에는 군산과 익산에 평준화가 재도입 되고, 2002년에는 수도권 7개 도시를 시작으로 2008년 까지 목포, 순천, 여수 김해 포항등으로 평준화 도입이 확산되게 된다. 비평준화 지역이던 경기지역 시민사회 단체들은 캠페인, 서명운동, 집회 등 다양한 방법으로 평준화 도입을 시도하고 여론의 지지를 이끌었지만 결정권을 쥐고 있는 보수적인 교육감의 벽을 넘지 못했다. 2010년 6.2 지방선거와 함께 진보교육감이 탄행하면서 분위기에 편승한 평준화 운동은 강원도교육청과 경기도교육청의 도입을 결정하도록 만들기에 이른다. 당시 강원도교육청은 70%이상의 압도적 여론지지로 평준화를 채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암초에 부딪치게 된다. 교육감의 권한사항이었던 고교평준화를 교육과학기술부는 ‘부령개정거부’라는 장치를 이용하여 강원도와 경기도 6개 지역의 평준화 승인을 2차례나 반려해 버린 것이다.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에서 진보교육감들은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에게 평준화 승인을 요구했지만 정권의 시각에 따를 수 밖에 없는 이주호 장관의 의지는 확고했다. 평준화 승인 반려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6개 시도 진보교육감들은 이명박정부의 교육행정인식을 교육자치말살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반발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가 우리나라 평준화 발전의 개괄이다. 그러면 눈을 우리가 살고 있는 안동으로 돌려보자. 고교 평준화 문제는 평준화와 선발을 번갈아가며 경험한 안동의 교육문제에 있어서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비평준화를 이야기하면서 빠지지 않는 메뉴중에 하나가 지역에서 인재를 육성하여 지역발전에 기여하고, 지역의 이름을 드높인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지역에서 고통스럽게 오로지 공부만을 위해 학대당한 청소년들은 지역에 남아있고 싶어 하지 않으며,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서 지역을 떠난다. 지역을 떠난 젊은이들은 지역에 대한 애착이 없다. 다시 오고 싶지 않은 막연한 향수로만 남을 뿐이다. 왜 그럴까? 지역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학교와 공부에 다 빼앗겨버렸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에 겪어야 할 사회적 경험들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아이들에게 남은 것은 일탈뿐이다. 실제로도 유명대학으로 진학한 젊은이들의 귀향은 그리 많지않다. 이런 현상은 일명 상위고등학교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성적이 낮은 고등학교에서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선발고사제도는 성적이 낮은 학생들과 그들의 부모 모두를 패배자로 낙인찍는 제도이다. 하위수준의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하소연 한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 보다, 상실된 자존감과 자아정체성을 심어주는 일이 더 시급하고 힘들다고. 부모들은 어떠한가? 자신의 아이가 상위고등학교를 진학하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고개를 못들고 다니게 된다. 이런 현상이 고착화되면 지역사회에 위화감이 심화되고, 그 균열로 인해 지역사회의 기반이 붕괴되게 된다. 상위고등학교 내에서도 문제는 존재한다. 중학교시절 반에서 1-2등을 다투던 아이들이 고등학교에서 30등 내외로 떨어지는 성적에 대한 자괴감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생각케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한다. 경험해 보지 못한 하위성적으로 인해 자존감의 상실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한 아이의 삶을 너무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돌이켜 보자. 교육의 근본 목적이 무엇인가? 교육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여러 가지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치고 가치와 철학, 인성함양을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전달하는 총체가 아닐까?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삶을 우리는 흔히 ‘행복’이란 단어로 표현한다.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다. 개인에 따라 행복의 가치는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의 교육은 행복의 관점에서 ‘무엇을’ 하면 ‘어떻게’ 살면 행복할까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가지면 행복하다’로 가르치고 있다. 지금 우리의 교육은 오로지 한가지 목적밖에는 없는것 같다. 대학진학이란 목표만 달성하면 인생이 달라질 것처럼,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처럼 아이들을 다그치고 현실을 호도한다. 그런 과정에서 청소년기에 경험해야 할 다양한 체험들과 사회적 경험들, 가치관에 대한 교육들을 유보시켜 버린다. 이 유보는 한 인간의 삶의 유보로 까지 이어진다.
사회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의 문제는 한가지의 원인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청소년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존 청소년문제의 대부분이 교육제도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교육을 엘리트육성의 과정으로만 인식하는 그릇된 가치가 획일적이고 지식만을 강조하는 교육의 틀로 만들어 버렸다. 공부할 사람은 공부하고, 기술배우고 싶으면 기술배우고, 놀고 싶으면 놀 수 있게 다양성만 열어두면 된다. 교육의 목적을 무엇에 두느냐에 따라 교육의 방법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우리의 교육방식과 과정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목적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 공부로 성공하는 사람 몇이나 될까? 우리는 대부분 평범하게 살아간다. 돌이켜 보면 평범하게 살기위해 죽어라고 공부시키고 줄세우는 것이 우리의 교육이다. 이런 교육의 틀을 바로 세워야 아이들의 미래가 행복할 수 있다. 그 첫걸음이 평준화이다. 안동지역사회의 건강성과 안동의 미래를 위해 이제 다시 평준화를 고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