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생애는 지성의 행동성, 그 바탕은 선비정신이다
독립운동 발자취 절반도 못 밝혀, 정부차원 면밀 조사 돼야
‘저항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에 대한 안동문화권의 자부심은 매우 높다. 그러나 ‘우리고장이 배출한 걸출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는 사실에서 더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이해도가 낮아지고 피상적 인식에 머물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40년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광복 66돌을 맞은 현재 육사에 대한 관심은 더 폭발할 기세이다. 지난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방영된 특집드라마 2부작 <절정>은 육사의 독립운동을 향한 내면적 고민을 담아내어 대중적 관심을 높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지역에서 육사문학을 연구하며 시조시인으로 활동해 온 육사문학관 조영일 관장(현 경북문협 회장)을 만나 육사의 삶을 씨줄로, 문학을 날줄로 삼아 그 함수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 이육사의 가계와 성장 환경, 주위 인물의 영향을 설명해 달라.
▶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원촌에서 태어나 유가의 엄격한 가학환경에서 성장했다. 조부인 치헌 이중직은 진보적인 관리였고 그 밑에서 공부를 했다. 외조부인 범산 허형은 선산, 구미, 칠곡 일대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의병장이었다. 범산 허형의 종형인 왕산 허위는 조선13도의 독립의병 총사령관이었다. 서대문형무소 교수형 1호가 왕산 허위 였다. 그 집안의 셋째 딸이 어머니 허길 여사이다. 여섯 아들을 앉혀놓고 ‘나라 잃은 땅에서 내가 죽더라도 울지 마라’고 했다고 한다. 육사도 어느 글에서 ‘우리를 지배한 건 무서운 규범이다’고 썼었다. 외삼촌 일헌 허규는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초대입법의원을 지낸 분이다. 외사촌 허은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손부가 되었다. 육사의 외가는 만주와 소련으로 거의 망명했었다. 육사가 남경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로 간 것도 어떤 연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말해 육사의 문학은 친가에서, 독립정신은 외가로부터 왔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 바탕은 선비정신이었다.
- 여섯 형제 중 육사는 둘째였다. 형제들의 삶은 어떻게 전개 되었는지 궁금하다.
▶ 맏형인 원기, 동생인 원일, 원조 등이 항일투쟁사에 이름을 남겼다. 형 원기는 한문학자였다. 셋째 원일은 서화에서 일가를 이룰 정도였다. 넷째 원조는 동경법정대학 불문학과 출신으로 평론가로 이름을 드날렸고 부인이 덕혜옹주의 육촌동생이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초대 서기장이었다. 다섯째 원창은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막내 원홍은 19세 나이에 조선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하고 요절을 했다. 해방 후 원일, 원조가 월북을 하였고, 원창은 한국전쟁 당시 형들을 찾으러 갔다가 해주에서 폭격으로 죽었다고 한다. 여섯형제가 불의에 갔지만, 사회적으로 모두 일가를 이룬 분들이다.
- 육사의 독립운동과 문학활동의 생애를 압축해 보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 육사의 생애를 정리한다면 한마디로 ‘나라를 찾는데 보여준 지성의 행동성’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였다. 시대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삶 속에서 그의 시를 읽어야 한다. 배운 만큼 행동으로 옮긴 분이다. 육사의 정신은 ‘내가 시를 쓰는 것조차 행동의 한 방편이다’고 밝히고 있다. 글쓰는 것도 나라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사람들이 시를 통해 문화적으로 일본보다 앞서 있다는 자긍심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독립할 수 있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김종길 교수의 평처럼 ‘독립의 한 방편으로 시를 썼다고만 하기에는 그의 일련의 작품들이 너무나도 절창이다. 우리문학사에서 이런 글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 지역차원에서는 언제부터 육사의 문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는지?
▶ 1976년 이전에는 정호경, 권정생, 이오덕, 이진구 등이 ‘장자회’ 모임을 하다가 그 전후에 육사를 공부하게 됐다. 당시는 살벌한 사회였다. 문화회관에서 토의를 할 때 형사들이 주위를 맴돌았다. 7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손병희, 김희곤 등이 참여했다. 80년대 들어서서 김종길 교수를 모시고 104점의 육사관련 자료를 모았다. 2004년이 오면 육사 탄생 100주기인데, 문학상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고심했었고,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고 육사문학관 설립까지 오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초등학교 교사로 문인이 되어 글을 쓰면서 육사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껴 가까이 다가간 계기가 됐다. 육사의 문학은 상당히 곡직하다. 문학적이면서도 한 시대의 정신을 안고 있는 것이다. 한 시대를 꿰뚫을 수 있는 의식에 대해 경이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 지난 3년간 육사의 삶과 문학정신을 다양한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무엇이 늘 고민인가.
▶ 대개 육사를 잘 안다고 한다. 하지만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예를 들어 효를 행하는데 있어 머리로는 다 알고 있지만 행하지 않으면 안다고 할 수 없다. 시대적으로 중요한 대목이다. 아는 것 따로 행동 하는 것 따로 분리해서는 개인도 사회도 발전할 수 없다. 육사를 통해서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일치, 이것을 본받아야 한다. 3년째 문학관의 사업은 첫째로 육사의 헌창사업이다. 34회를 맞은 육사백일장에서부터 시낭송회, 시노래 발표, 시극공연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둘째로 육사연구사업이다. 시와 독립정신, 투쟁의 실체를 밝히는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셋째로, 문학의 이해와 저변을 넓히는 사업으로 문학강연회, 토론회, 독자와의 만남, 찾아가는 문학회를 펼치고 있다. 지역문학의 활성화에 한 몫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이번 8.15 광복절 날 방영된 <절정>에 이어, 내년 3.1절을 기해 공연을 한다는 계획으로 ‘뮤지컬 이육사’가 서울에서 준비되고 있다. 올 가을에는 육사의 시로 작곡한 시노래 발표가 있을 예정이다.

- 육사의 독립운동 속에는 사상적으로 ‘아나키스트’라는 말이 있다. 육사의 독립운동 행적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
▶ 육사의 문학은 약 90% 밝혀졌지만, 독립운동은 50%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육사는 무기를 가지고 비밀결사운동을 해 왔기 때문이다. 사실 육사의 마지막 순국과정도 미궁이다. 육사의 마지막 발자취가 오리무중이라는 얘기이다.
1943년 5월, 국내에 들어와 6월 원천에서 모친 소상을 치룬다. 그해 7월 동대문경찰서에 체포가 된다. 그런데 기록상으로 보면 8월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이 되는데 그 이후가 애매하다. 유족들은 43년 8월에 중국 북경으로 끌려갔다고 하는데. 육사와 가장 친했던 신석초 시인은 가을이라고 주장을 한다. 또한 경찰관계자들은 1943년 겨울이라고 주장하는 등 엇갈리고 있다. 따라서 1943년 8월부터 겨울 사이에 북경으로 끌려갔는데 1944년 1월 16일에 순국했다. 사실상 체포이후 상당히 짧은 기간 안에 순국을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있다. 첫째로 왜 육사가 북경으로 끌려가야만 하는가이다. 외국에서 체포가 되더라도 국내로 끌고 오는데 굳이 중국으로 끌고 갔느냐 이다. 그 배경이 복잡하다. 현재 육사문학관에 ‘조선독립의용대 발대식’ 사진이 있다. 사진의 의미가 무엇이냐? 1940년대 들어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패전을 예견한다. 국내에서의 무장봉기를 중요시했다. 무기가 절실했고 무기를 구입하는데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당시 무기구매 책임이 육사에게 있었다. 육사가 무기 구매자금을 구하는 다양한 행적이 나오고 있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중국으로 끌려간 것은 대질심문을 하려고 끌고 간 것이 아닐까 추정을 하고 있다. 둘째로, 1943년 1월 16일 새벽 5시 북경에 있는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당시 영사관이 감옥을 가지고 있었느냐에 의문이 있다. 교도소라면 최소의 인권이 보장된다. 당시의 증언에는 육사의 시신이 피투성이었다. 헌병사령부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발생했겠느냐는 추론이 가능하다. 육사가 중국을 수 없이 왕래하면서 있었던 독립활동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민간차원이든 정부차원이든 육사의 독립운동 행적과 발자취를 찾아 나서서 면밀히 조사해 봐야 한다.

- 육사문학관을 어떻게 관람해야 제대로 느끼고 호흡할 수 있나.
▶ 육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1층이다. 육사의 가계, 유품, 독립운동, 문학활동 등이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해설사 설명을 들으면 이해가 된다. 그리고 육사를 감성적으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12분짜리 영상물을 볼 수 있다. 출생에서부터 타계까지 영상을 보면 관람객 3분의 1 가량이 눈물을 적신다. 부수적으로 생가, 시비, 묘소 등을 볼 수 있다. 문학관 전체적인 배경이 육사의 고향, 육사의 문학적 배경, 문화사적 측면 3가지다. 도산구곡의 중심이 원천이다. 원천, 토계, 하계를 배경으로 520여 진성이씨 집성촌이 살던 곳이었다. 안동이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안동의 정신문화의 엑기스가 이곳이다. 독립운동 유공자 27명, 퇴계이후 대과에 나간 사람이 24명이다. 퇴계 성리학의 성지가 이곳이다. 조선독립운동사를 보면 조선독립운동 최초의 근거지는 안동군 도산면 토계리였다 라는 시작문구가 있다. 1910년 이후 독립운동이 아닌 1906년 갑오의병 당시 안동에서 의병이 일어난 곳이 이곳이었다. 우리나라 의병 출발지가 이곳 도산 토계였다고 보면 된다.
- 육사문학관은 육사를 새롭게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육사문학관이라는 표현 때문에 육사의 독립운동이라는 측면이 다소 희석되지 않나 싶다.
▶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문학관 조성을 할 때 고민이 많았다. 이육사문학관이냐 이육사독립기념관이냐? 였다. 결론적으로 이육사문학관으로 했다. 이유는 문인으로서 육사가 너무도 많이 알려져 있다. 1910년 이후 현대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100년의 시간 속에서 이육사의 ‘광야’를 최고로 평가한다. 문학관을 통해서 육사를 충분히 알릴 수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러나 이곳에 방문하는 이들에게 육사의 문학이야기보다는 마흔살의 짧은 생애에 처절하게 독립에 바친 그 속에 육사의 문학이 있다고 강조를 한다. 순수한 문학으로만 보지 말아 달라. 문학의 바탕엔 나라를 되찾는 독립이 배경이다. 이 두 가지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