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내리쬐는 모든 자리에 구원은 있다
햇볕이 내리쬐는 모든 자리에 구원은 있다
  • 유응오 불교투데이 편집장
  • 승인 2009.01.22 21: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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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인다르마 - 이창동 감독의 밀양

 ‘종교는 성이 아니라 속의 영역’ 주제의식 압권

시종일관 비치는 햇볕, 여래장 사상 떠올려
 

우희종 교수는 <삶의 자세와 십자가의 의미>라는 글에서 “과거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삶과 더불어 수많은 문학과 미술의 소재가 되어 왔고 이제는 인류 문화유산의 커다란 한 부분이 되어 있지만, 신약의 클라이맥스가 십자가 사건이요, 이러한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진리와 단절되고 소외되어 온 인간의 본원적인 고독한 삶이 관계회복을 통해 자신의 본래의 자리(本來面目)로 되돌아가게 되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거듭 태어나고자 하는 신심과 용기 있는 자라면 바로 이 상황 속에서 십자가의 보혈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며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우 교수는 아래와 같이 해답을 내놓는다. 

  “진리라는 것이 너와 나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代贖)의 길을 걸은 예수의 보혈은 결국 인간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폭력을 행사한 하느님의 원죄(原罪)를 위하여 흘린 것임을 확신한다.”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인류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계율로 이뤄진 구약시대에서 무엇을 ‘하라’는 신약시대로 옮겨오게 됐다. 구약시대가 율법의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할 수밖에 없는 시대라면, 신약시대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주체로서 인간을 신뢰하는 하느님의 따뜻한 시선이 깃드는 시대이다. 신약시대가 도래함으로써 단절됐던 하느님의 인간의 관계는 다시 복원되며 이를 통해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인 하느님의 고백은 우리 각 개인의 고백이 됐다. 예수의 보혈로 인해 성(聖)의 영역과 속(俗)의 영역은 더 이상 분리되어 존립할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종교는 인간들의 삶의 현장에서 현현(顯顯)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창동의 <밀양(Secret Sunshine· 2007)>은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심원한 주제를 가져가고 있어 종교인이라면 누구나 관심 깊게 볼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밀양(密陽)’은 공간적 배경이 되는 지명인 동시에 주제이다. 영화는 신애(전도연)가 아들 준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이사를 오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차가 고장이 나서 카센터의 종찬(송강호)이 와서 도와준다. 그때 하늘에서 환한 햇볕이 은밀하게 내리쬔다.
 
 그런데 준이 유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준은 천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때에도 햇볕은 내리쬔다. 생리통 때문에 병원을 찾은 신애에게 은혜약국의 여자 약사는 교회에 나올 것을 권한다. 그리고 “저 햇살 속에서도 하나님은 계시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신애는 햇살이 비치는 곳에 손을 갖다 대면서 “무엇이 있냐?”고 반문한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화병이 생긴 신애.
 
 그녀는 길을 걷다가도 복받쳐 오는 슬픔에 어쩌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쥔다. 그러다 어느 건널목 앞에서 교회 부흥회를 알리는 현수막을 본다. ‘상처 받은 영혼의 치유를 위하여’. 신애는 곡두에 홀린 듯 허청허청 교회에 들어간다. 그리고 구원을 얻는다. 통성 기도하는 신도들 속에서 신애가 울부짖을 때에도 목사의 손은 따뜻한 햇살과 같이 신애의 머리에 얹힌다. 신애는 교회를 다니면서 새 삶을 얻게 되고, 급기야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한다.
 
 면회실 유리 칸막이를 두고 마주 선 피해자와 가해자. 그런데 살인범은 “하나님께서 죄 많은 죄인을 용서해주셨다”고 말한다. 죄 사함을 받은 이답게 그의 표정은 한없이 평온하다. 신애는 순간 당황한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가? 충격을 받은 신애는 교도소를 돌아 나오다 말고 그만 쓰러진다. 그때에도 햇볕은 내리쬔다. 이후 신애의 행동은 위악적으로 변모한다. 부흥회 현장에 찾아가 유행가 노래를 트는가 하면, 교회장로인 약사를 유혹해 섹스를 하려고도 한다.
 
 견디다 못한 신애는 과도로 손목의 핏줄을 자른다. 영화는 신애가 병원을 퇴원하면서 끝이 난다. 미용실에서 살인범의 딸을 만난다. 미용실을 박차고 나오는 신애는 집으로 돌아와서 마저 제 머리를 자른다. 종찬이 거울을 들어서 도와준다. 그때 거울에 비춰 조각조각 빛을 발하는 햇살, 밀양(密陽)이다.
 
 영화 내내 종교인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매우 냉소적이다. 마치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가 성직자에게 던진 말,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영화를 보고 나면 가장 먼저 구원이란 무엇인가?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고,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다소 현학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에 대해 김호성 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는 《불교, 소설과 영화를 말하다》에서 보조 지눌 스님의 얘기를 끌어온다.
“자신이 지은 죄와 업장이 마치 산과 같다면 바다와 같은 줄 알아서,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으로 참회할 줄 알아야 한다.”
보조 지눌 스님의 말은 정신적, 심리적인 참회와 더불어 물질적, 현실적인 참회가 이뤄져야 제대로 된 참회가 된다는 뜻이다. 
 

<밀양>은 바로 구원이, 즉, 참회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며, 성의 영역이 아니라 속의 영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가 시작된 이래 끝이 날 때까지 계속해서 햇볕은 내리쬔다. 그러나 그 햇볕은 너무 환해서 눈이 부실 정도이다. 마치 신애에게 구원이 그런 것처럼. 은은한 햇볕이 내리쬐는 순간은 영화의 마지막뿐이다. 성(聖)의 영역에서 속(俗)의 영역으로 내려오는 햇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은 구원의 문제도 그 해답은 속(俗)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단서는 신애를 한 결 같이 보살피는 종찬에서 찾을 수 있다. 신애가 말했다시피 종찬은 ‘속물’이다. 속물인 종찬이 신이 구원하지 못한 신애를 구원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무릇 모든 종교는 세간/출세간, 차안/ 피안, 역사현실/ 하늘나라, 현상계/ 본질계, 시간/ 영원 등으로 이원론적으로 나눠서 생각한다. 성(聖)의 영역, 즉, 한 발 물러서서 우러러 볼 수 있는 숭고한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비루한 현실에도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이나,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 ‘하나님의 씨’가 있다”(<성경> 요한 1서 3장 9절)는 ‘하나님의 모상론’에 귀 기울여 보면 성과 속이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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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dosisp 2009-12-18 14: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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