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들까지 현달해 화려한 출사 이어져'
<기획연재-약봉 서성과 소호헌>
[최성달의 儒佛 에세이 - 8]
약봉 서성과 소호헌
안동에서 소호헌이 갖는 의미는 복잡 미묘하다. 안동이 퇴계학에서 비롯된 영남학맥을 이룬 남인 계열이었던데 반해 소호헌은 약봉 서성 이래로 노론 계열로 정치적으로는 여야로 갈려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마을에는 퇴계학맥의 거두인 대산 이상정이 강학한 고산서원이 있었다. 이 고산서원에서 이름난 대학자들이 배출되었지만 정치적으로 불우한 환경 때문에 조정에 출사하는데 여러 애로점이 있었다. 영남학맥은 아예 과거를 포기하고 산림처사로서 학문에 전념하거나 급제하여 관로에 발을 들여놓은 경우에도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그만큼 몸과 가문을 보전하기가 어려웠었다.
반면, 소호헌은 약봉 서성이 퇴계 학맥이 아닌 율곡 문하에서 공부하고 성장한 덕택에 그의 후손들의 출사는 그야말로 화려하기까지 했다. 그 자신이 5도의 관찰사를 역임하고 5조의 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에 오를 만큼 승승장구했다. 약봉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후손들도 모두 현달했다. 맏아들 경우는 청요직을 두루 지내고 정승(우의정)으로 있다가 73세로 세상을 마쳤다. 둘째, 경수는 종친부의 전첨을 지냈고, 셋째, 경빈은 과천현감을 거쳐 1655년 수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거느리고 안동 소호리 약봉 태실로 낙향했다. 넷째, 경주는 선조의 맏사위가 된 인물이다. 1592년 선조대왕의 맏딸인 인빈김씨 소생의 정신옹주손과 혼약을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왕을 호종한 뒤 이듬해 환도한 후 혼례를 올렸다.
그러나 소호헌의 후손들이 정계에 진출하여 화려한 이력을 쌓았지만 문중사에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호헌은 원래 고성이씨 임청각 가문의 소유였다. 임청각 종손 이명은 다섯째 아들인 무금정 이고(無禁亭 李股 - 청풍군수역임)가 분가하자 소호헌을 지어주었다.
그 뒤 약봉 서성의 선친인 함재 서해가 이고(李股)의 외동딸과 혼인함으로써 달성 서씨의 소유가 된 것이다. 장인인 이고(李股)는 재산의 한몫을 사위 서해(徐懈)에게 나누어 줌과 함께, 학업에 독실한 그를 위하여 웅장한 규모의 서재를 지어 주었는데, 그 서재가 곧 보물 제475호로 보존되는 ‘소호헌’이다.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연구한 서해(徐懈)는 언양공 서거광의 증손이며 예조참의 서고의 아들이다. 15세에 고성이씨와 혼인하여 20세에 약봉 서성을 낳았다. 학문이 깊고 사우의 촉망이 두터웠으나, 약관 23세로 명종 14년(1559) 아깝게 죽는다.
약봉 서성은 서해의 유일한 혈육인데 명종13년(1558)에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생후 1년 반이 못되어 부친 함재공이 별세를 했다. 이 때 함재공 집안은 예조참의를 지낸 조부가 약봉이 태어나기 8년 전에, 조모는 그보다 5년 전(1545년)에 돌아가시고 없었다. 백부(伯父)또한 조모가 돌아가시던 해인 인종1년(1545)에 내외가 서로 몇 달 간격으로 졸하였다.
때문에 당시 집안 어른으로는 당년 25세의 어머니 이씨와 서울에 사는 31세의 중부(仲父) 춘헌공 서엄(崦)내외가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 이씨는 고립무원의 약봉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중부에게 아들을 의탁했다. 춘헌공의 양자로 입양(명종15, 1560년)했는데 아들의 장래를 위한 결단이었다. 이때부터 춘헌공이 세상을 떠나는 선조6년(1573)까지 약 10년간 약봉은 중부(仲父)의 극진한 사랑 속에 글을 배우고 장가를 들었다.
중부 춘헌공은 약봉의 문재를 보고 크게 대성할 것을 믿었지만 손이 귀한 집안이라 그저 건강하게 자라줄 것만 빌었다. 여기에 관한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서울로 올라온 약봉의 어머니 고성이씨는 이곳에 집을 마련하면서 소호의 친정집처럼 엄청나게 크게 지었다. 이 때문에 주위에서 식구도 단촐 한데 왜 저렇게 집을 크게 지을까라는 말들을 듣게 된다.
이 때 이씨 부인은 “우리 집안이 지금은 단촐 하지만 필히 후일에는 창성(昌盛)하여 이집도 협소하다고 할 날이 올 곳이요.” 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춘헌공의 애달픔처럼 집안의 세조(世祚)가 오직 약봉 한 사람에게 달려 있는 부절여선(不絶如線)의 절박한 상황을 이겨내리라는 여망이 담겨 있었다. 약봉 서성의 모 고성이씨는 눈먼 몸으로 혼자 어렵사리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지극정성으로 아들의 공부를 돌보았다고 한다. 요즘도 우리가 즐겨먹는 약식은 이 눈 먼 어머니가 자식 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만들어 팔던 것이다.
이런 간절함과 정성이 있었기에 과연 부인의 소망대로 부절여선의 막급한 상황은 약봉 이후로 운조(運祚)가 크게 열려 집안이 흥왕(興旺)한다. 약봉 서성의 맏아들 경우는 우의정, 다음 경수는 종친부전첨, 경빈은 현감, 경주는 선조의 사위로, 여러 형제가 모두 현달했고, 약봉의 후손에서 문과급제가 무려 121명이나 쏟아졌다. 3대 상신으로 종태, 명균, 지수가 있고, 3대 대제학으로 유신, 영보, 기순을 내고, 3대 학자로 명응, 호수, 유구 등을 냄으로 하여, 소호리에서 터전을 닦은 경파 서씨는 나라에서도 가장 빼어난 명문이 된 것이다.
참고로 소호헌의 내력 중 이 건물이 잠시 타인 소유로 넘어 간 적이 있었다. 실록에 기록된 걸 옮기면 이렇다.
“나라 일에 공정을 기하시고 사사로움에 치우치지 아니하시며 국정이 어지럽고 왕실이 혼잡했을 때 엄정하게 중립을 지키시었으며 더욱이 친가에도 심려하시어 안동에 있는 약봉고의 태실과 소호헌-함재 서해(涵齋 徐懈)공이 수학하시던 집-을 불미한 자손이 있어 타인에게 매도해 버린 것을 왕후께서 그 정상을 아시고 내탕전(왕후의 용전)을 내 주시며 환매하심으로 지금까지 서씨 종중 소유로 보존되고 있으며 현 정부에서 국보 제 475호로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74년 정부로부터 보수경비를 지급 받아 보수한 바 있다.”
건축물로서의 소호헌
조선 중종(中宗) 때의 선비 함재(涵齋) 서해(徐懈)가 거처하던 건물로 앞면 4칸, 옆면 2칸의 단층 팔작 기와집이다. 1920년대에는 근대교육을 담당하는 일직서숙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권오설이 강학하고 대구 서씨가 운영자금을 댔다.
건물의 평면구조는 대청(앞면 3칸, 옆면 2칸)과 누마루(앞면 1칸, 옆면 2칸)가 일자로 연결되어 있고 2/3쯤 되는 곳에 온돌방(앞면 2칸, 옆면 1칸)이 연결되어 있는 T자형으로 특이하다. 대청과 누마루는 판목으로 만든 양청(凉廳)으로 고상식(高床式)의 개방적인 건물 전형을 보여주며, 온돌방은 저상식(低床式)의 영향으로 고상식과 저상식이 절충된 양식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대청과 누마루 사이에는 사분합의 띠살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했으며 누마루와 방 뒤 툇마루에는 난간을 돌렸다. 공포는 초익공계(初翼工系)이며 종보[種樑]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과 솟을대공을 얹었는데 주택건축에서 솟을대공을 사용한 예는 이외에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대청은 가구(架構)가 드러난 연등천장이며 약봉태실(藥峯胎室)이라는 편액이 있다.
이 건축물은 임진왜란 전까지 고상식의 개방적인 구조가 주류를 이루었던 안동지방에 임란 후, 북방의 온돌방이 첨가된 것으로 양청과 온돌방의 공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주춧돌 위에 곧바로 기둥을 세우지 않고 정(井)자 모양 의 귀틀을 짜 올리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 것과 기와에 새긴 쌍비룡문은 후학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연못에 인접한 건물이어서 대청 아래 공간의 습기를 줄이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며, 대청 툇마루 아래에는 환기구멍을 두어 건물이 습해를 입지 않도록 했다. 보물 제4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