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市단위 안동에 독립운동기념관이 설립됐나요?’
1894년 항일의병항쟁의 출발지부터 만주땅으로의 집단망명까지...
독립운동유적 해설사 제7기 안동교육과정 첫째날(1)
직장인 정은영(44)씨는 경기도가 고향이지만, 80년대 중반 대학생으로 안동지역과 인연을 맺었고 졸업후 안동출신인 남자와 결혼해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몇 년 전 초등학생인 딸이 수업시간 중, 독립기념관이 있는 장소를 묻자 대뜸 ‘안동이요’ 라고 답변을 내놨다고 에피소드를 말했다. 천안에 소재한 독립기념관은 가지 못한 상태에서, 안동독립운동기념관만 견학했으니 어린학생 입장에서는 나름 정답을 제시한 셈이다.
2007년 8월10일 전국 기초지자체 중 유일하게 문을 연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의 다양한 선양사업 중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독립운동유적해설사’ 교육과정이다. 문화해설사나 관광해설사 양성과정은 들어본 적이 많지만, 독립운동유적해설사는 생소한 편이다. 지난해까지 6기과정을 끝냈고 올해는 7기과정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듣고 수강생으로 등록했다. 전체 교육일정표를 받아보니 3월16일부터 7월6일까지 총 8일간의 커리큐럼으로 짜여져 있다. 이번 7기과정은 직장인의 참가율을 높이기 위해 정기적으로 토요일에 교육이 시작됐다. 첫날인 3월16일 오전10시. 안동시 임하면 내앞마을에 위치한 기념관 지하강의실 좌석이 꽉 찼다. 얼추 둘러보니 7기과정 수강생의 연령대가 노장청(老壯靑)으로 골고루 섞여 있었다. 삼십대도 몇몇 보이는 것 같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열배나 많은 독립유공자 그 수수께끼는
10시30분. 첫 강의는 김희곤 관장(안동대 사학과교수)으로부터 시작된다. 강의주제는 ‘한국독립운동사와 안동독립운동의 위상’ 이다. ‘독립운동’과 ‘식민지해방운동’에 대한 용어의 쓰임새부터 설명이 시작되었다. 식민지와 제국주의는 엄연한 사회과학적 용어이다. 하지만 남북분단이라는 정치, 군사적 대치와 갈등구조가 워낙 뿌리깊다보니 근대독립운동사의 개념하나에 이르기까지 우리사회의 의식을 옥죄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좁은 이념적 구도를 뛰어넘는 객관적 항일독립운동의 시각과 관점이 요구되고 있다고 강의를 풀어나갔다.
왜 유독히 안동지역에서 독립운동기념관이 운영되어질 수밖에 없었는가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다. 이에 대해 1894년부터 1945년까지 약 51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줄기차게 진행된 안동권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를 일곱가지의 특징을 들어 서술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독립운동의 출발점이 바로 안동지역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서장(序章)이 의병항쟁인데, 첫 의병인 갑오의병(1894년)이 일어난 곳이 안동이라는 것이다. 전국 시․군(市郡) 단위의 평균 독립운동 유공자 수가 30~40명 정도인데, 안동지역은 341명(2012년 3월 현재)에 이른다는 것과 1910년 한일병탄 전후에 전국의 70여명 순절자 중에서 무려 10명이 안동인 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독립운동의 전 노정에서 최고위급 지도자들이 대거 배출됐다는 점과 함께 지역출신 독립운동지도자들이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이었다는 특징도 강조되고 있다.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안동인들이 펼친 독립운동의 지속성’이 특별나다는 점이다. 의병과 3․1운동을 넘어서서 사회운동과 함께 만주지역에서 독립전쟁을 끊임없이 펼쳐나갔다는 것까지 주목할 수 있다고 했다. 나아가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통치에 맞선 식민지 해방투쟁 유형 중 ‘유교문화권의 식민지 해방투쟁’이라는 모델을 보여준 사례는 향후 더 깊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고향에서 일제와 적당히 타협하고 살면, 권리를 충분히 누리고 살 지배계급이자, 넉넉한 살림살이에 빼어난 학문을 자랑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지만,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온 가족이 모두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길을 나섰다는 것이다. 몇 사람이, 몇 집안이 떠났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내앞마을에서만 의성김씨 150명이 떠났고, 법흥동과 와룡면 도곡동에서는 고성이씨 150명 정도가 망명의 길을 나섰다고 하니 그 규모와 분위기를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 행렬에는 학맥과 혼맥이 얽힌 집안들이 대거 동참했으니 이를 안동문화권이라는 권역으로 설명이 되고 있다. 만주로의 망명을 주도한 주역들을 ‘혁신유림’으로 지칭하고 있다.
계몽운동 본산지 ‘협동학교’ 정신은 신흥무관학교로 이어져
점심식사 후, 교육생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전시실을 관람했다. 기념관에서 일하고 있는 학예사가 전시물 하나씩을 소개하는 식의 시청각 교육이 진행됐다. 이어 오후 2시부터 의성김씨 종택 대청마루에서 김승균 교남문화연구원의 짧은 강의를 듣고, 다함께 마을답사가 시작됐다. 내앞마을 로의 입향과 함께 문호의 형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협동학교’가 더 주요 관심사이다. 협동학교는 일제하에서 안동지역 계몽운동의 본산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1906년 동산 류인식이 내앞 종손인 김병식과 그의 재종형제 김후병, 하중환의 협력과 김긍식(김동삼의 본명)의 적극적 활동에 힘입어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백하 김대락도 그의 매부인 석주 이상룡이 대한협회안동지회를 설립하고 신문명을 제창하자 계몽운동에 합류했다. 1910년 한일병탄 이후 내앞마을의 협동학교 인사들 대부분이 만주망명을 하게 되었고, 이후 협동학교는 수곡 한들로 옮겨진 뒤 1919년 챗거리 만세운동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 된다. 협동학교 설립에 적극 참여한 인사들과 그곳에서 배출된 인사들은 만주망명 이후 경학사, 신흥학교, 백서농장 등에서 독립전쟁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내앞마을 답사에서는 백하 김대락의 삶에 주목해야 한다. 1911년 1월 67세의 고령이지만 백하 김대락은 아들인 월송 김형식 등 일가를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김대락은 석주 이상룡과 처남매부간이다. 이상룡에 앞서 먼저 가산을 정리해 떠난 것이다. 달포 뒤 이상룡도 일가족을 이끌고 망명에 성공한다. 압록강을 건넌 후 김대락의 손부가 해산을 하자, 아이의 아명을 ‘쾌당(快唐)’이라고 짓는다. 원수 일본의 아귀를 벗어나 중국에서 아이를 얻으니 통쾌하다는 의미였으니, 나라 잃은 설움에 힘겨워했지만, 겨레애가 어느 만큼 절절했단 것인가. 하지만 망명 4년 후인 1914년 김대락은 일흔의 연세로 세상을 떠난다.
또한 일송 김동삼이 전 생애를 걸고 펼친 국내외 항일투쟁의 궤적에도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7개의 일일강좌 중에는 내앞마을이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의의에 대해 더 살펴보는 시간이 남아 있다.
첫날인 만큼 40여 명의 교육생들은 익히 아는 얼굴이 많지 않은지라 서먹한 분위기도 컸다. 4월6일 열리는 두 번째 강좌부터는 7기 교육생 대표단을 선출하고, 명찰을 달아준다니 좀 더 화기애애해 질 것이다. 교육과정은 오전에 기념관에서 한국독립운동사와 안동인이 펼친 독립운동사에 대한 전반적인 강의를 듣고, 오후에 안동지역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답사하게 된다. 또한 서대문형무소·천안 독립기념관 등 전국의 현충시설을 탐방하는 현장교육도 함께 실시할 계획이다. 2007년부터 전국최초로 독립운동유적해설사 양성과정에 돌입해 지난해에 6기까지 수료한 교육생이 무려 240명이다. 그들 중에는 100여명이 넘게 ‘나라사랑봉사단’을 결성해 해설사 자원봉사활동을 자임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