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집단망명 목적은 독립전쟁 위한 군대양성
만주지역 항일운동사적지 탐방-①
백하, 석주, 일송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왜 만주로 갔을까?
1911년부터 1940년까지 30년, 代를 이어 싸웠다
호연히 나섰으나 아직 분열된 조국, 통일염원 남아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진행하는 제11차 만주지역 항일운동사적지 탐방 길에 따라 나서기 위해선 사전학습이 필요했다. 6월3일 답사예비교육에 참석해 받은 책 한권을 급히 읽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인 김희곤 교수가 지난해 12월에 펴낸 『안동사람들이 만주에서 펼친 항일투쟁』이다.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읽기에 편했다. 틈틈이 읽는 과정에서, 2011년이 ‘만주망명 백주년’이라는 기억을 되살리게 되었다. 독립운동에 안동문화권 사람들이 기여도가 높았다는 것은 이제 상식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새삼 놀라고 있는 사실은 1911년 당시 안동문화권의 만주로의 집단망명은 오로지 항일투쟁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면, 대개 ‘개인적인 측면’에 천착하는 습관이 있다. 일 개인의 결단으로 고향과 직위를 버리고 혈혈단신으로 나선 지사적 모습을 그리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안동문화권 만주독립투쟁은 규모면에서 ‘집단성’을 이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를 “그 어느 곳보다 집중적이고 대규모였다”고 설명했다. 즉 문중별 집단 기획 망명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문중과 학맥, 혼맥으로 얽인 인물들이 한꺼번에 집단적으로 망명했다는 것을 다시한번 되살릴 수 있었다.
나아가 ‘독립투쟁’이라는 것도 개인의 결단을 통해 목숨을 걸고 총 한 자루를 쥐고 있는 모습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일 개인의 투쟁이라는 협소한 인식을 자주 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독립투쟁’이라는 카테고리를 뛰어넘는 ‘독립전쟁’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
풀어서 다시 얘기하자면, 1910년 국망(國亡) 이후 안동문화권 사람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대규모로 집단을 구성해 만주로 준비된 집단망명을 이뤄냈고, 독립군 기지를 건설해 조직된 군대의 힘으로 국내로 진격하는 독립전쟁을 벌여 끝내 조국광복을 이루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장한 군대로 조직적인 독립전쟁이 무려 30여 년 동안 끈질기게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1세대에서 2세대로 이어지는 대(代)를 통한 독립전쟁이 1940년까지 펼쳐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월10일 일요일 12시45분 인천공항에서 심양 행 비행기를 탔다. 옛 이름은 봉천이다. 만주동북지역의 가장 큰 도시이다. 1895년 이후부터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격돌할 때 핵심적인 분쟁지역이었다. 러일전쟁(1904~1905) 중에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흩날리고 있는「9.18사변기념관」을 방문했다. 1931년 9월18일은 일본이 만주지역을 침략한 날이다. 기념관은 규모면에서 크고 웅장했다. 길면서도 요리조리 미로처럼 뻗어있는 내부 전시실에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침략을 당했던 시기에 저항과 항쟁에 떨쳐나섰던 만주인들의 투쟁역사와 사진, 유물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해 놨다. 주마간산격의 관람을 통해서도 우리는 외세침략으로 압박과 고통을 당했지만 결코 굽힘없이 항쟁에 나섰던 피어린 역사의 흔적과 피 흘린 선구자들의 모습을 잊지 않겠다는 중국인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곤 바로 통하시로 이동을 시작했다. 차량으로 5시간을 달린다. 반도에 갇혀 살아온 한국 사람들은 이동거리 시간에 놀란 표정을 짓곤 한다. 만주라는 땅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 자라온 우리에게 그 실체를 단숨에 가늠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먼저 지도를 펴 들고 자세히 봐야 한다. 중국의 동북3성은 ‘요령성’과 ‘길림성’ 그리고 ‘흑룡강성’으로 지칭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요령성 심양시에서 길림성 통화시로 이동 중이다. 갈라진 북녘땅 끝의 신의주에서부터 압록강 줄기를 따라 위쪽으로 선을 그으면 보면 백두산이 나온다. 그 위쪽이 만주이고 우리는 이곳 남만주이자 서간도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만주는 남만주, 동만주, 북만주로 나눌 수 있고 남만주지역에 서간도가 있다. 백두산 서쪽이자 압록강 너머이다.
지난해 만주망명 100주년 기념 특별기념전 주제가「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만주를 품은 안동 여인들! 광복의 꽃이 되다」였다. 그 무대인 서간도이다.
그런데 석주 이상룡과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 등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왜 만주땅으로 갔을까? 만주망명을 선택한 이유는 일제침략과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였고, 독립군을 길러 독립전쟁을 펼치겠다는 목표까지는 단번에 이해가 된다. 1860년대 이후 시작된 만주로의 이주 대열은 나라가 무너지던 무렵,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이 잇따르면서 빠르게 늘어났다. 국망 이전에는 먹고 살기 위해 길을 찾아 나선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다. 여기에 독립운동가들은 만주가 우리의 역사가 있었던 무대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옮겨가기 좋고, 넓고 넓은 빈 땅이 있어 개간하기에 적당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곳에 먼저 정착한 수십만의 동포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주며, 동포사회 곳곳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겠다는 뜻을 실천한 것이다.
11일 월요일 아침 일찍 통하시를 출발해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로 향했다. 삼원포는 고대사회 시절부터 군사요충지로 알려진 작은 동네이다. 이곳은 심양쪽의 일본영사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고, 일본군으로부터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 있는 산촌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대락은 1910년 12월24일 안동을 떠나 추풍령~서울 남대문역~의주 백마역~신의주를 지났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 만주 안동(지금의 단동)에 이르고, 1911년 1월15일 회인현 항도촌(지금의 횡도천)에 도착했다. 여기서 겨울을 넘기고 4월19일 삼원포에 도착한다. 이어 이상룡은 1911년 1월6일 안동을 출발해 김대락과 같은 길을 따라 1월27일 압록강을 건넜고, 2월7일 항도촌에 도착한다. 그는 떠나기에 앞서 1월4일 ‘거국음(去國吟)’이란 시를 지어 읊었다. 최종 목적지는 유하현 삼원포 이었지만 5월 하순경 유하현과 통화현의 경계에 위치한 영춘원으로 이사했다가 10월 경 다시 유하현 대우구로 옮겨 살며 활동을 시작하였다.
서간도의 유하현 삼원포는 세골에서 흐르는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는데, 서간도 독립운동지의 중요한 발원지였다고 한다. 삼원포에서 서쪽으로 7리쯤 떨어진 마을이 추가가 이다. 마을 뒤로 대고산이 솟아 있다. 이 지역은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집안에서 북으로 오녀산성이 있는 산맥을 넘어 통화에 이르고, 삼원포가 있는 유하를 거쳐 다시 북상하면 길림으로 향하는 곳이다. 안동사람들은 통화와 유하에 정착을 시작했다. 이후 국내동포들에게 이주를 권고해 1911년에 약 2천5백여 명을 이주시켰다는 조선총독부 기록이 있다. 1920년대 말에는 이주 동포가 2만5천명이나 됐으니 얼마나 조직적이고 대단위적인 투쟁이었는지 상상이 된다.
답사 일행을 태운 버스가 추가가로 향하고 있는데, 중국 공안차가 따라 붙었다. 대고산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버스를 멈추게 했다. 답사 해설을 맡은 연변박물관 허영길 연구원 통역을 빌리자면 “이곳은 군사기지시설이 들어서는 곳이니 돌아가라”는 지시가 있다는 것이다.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도 운전대를 돌려야 할 판이다. 버스가 뒤돌아 나오는데도 공안은 정차를 요구했고, 갑자기 여행사 가이드 김선화와 허영길 연구원이 연행됐다. 버스는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무려 두시간을 서 있었고, 구체적인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 답사일행은 무작정 기다릴 뿐이다. ‘아~ 우리의 답사 발길을 반기지 않는구나!’ 라는 느낌을 받을 뿐이다. 한참이 지나 풀려난 후에 설명을 들어보니, “이곳뿐만 아니라 다음 답사지인 합니하 신흥무관학교와 백서농장 또한 군사기지시설이니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쉽고도 답답한 마음이 일었다. 갈수 없으니 답사 설명서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답사 설명서에 따르면 독립운동의 첫 교두보는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로 조직되었다. 경학사는 동포사회의 자치조직이며 동시에 독립군의 기반이 되는 기초조직으로 볼 수 있다. 경학사는 동포사회를 형성하고 운영해 나가는 자치조직의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한인들을 위한 집과 땅을 마련하고 만주족을 비롯한 중국인들과의 조화를 도모해야 했다. 또한 국내동포들의 이주 교통로를 확보해 나갔다. 이런 다각적인 역할을 수행한 경학사의 초대 사장이 바로 이상룡이다. 원로인 김대락이 힘을 보탰고, 류인식이 교육부장, 김동삼이 조직과 선전을 맡았다. 서울에서 온 이회영이 조직부장, 이동녕이 재무부장, 장유순이 농무부장을 맡았다. 1913년 이후에는 이 경학사의 역할을 광업사(廣業社)가 맡게 된다.
이후 신흥무관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신흥강습소는 1912년 음력 6월7일 통화현 합니하에 토지를 구입하고 학생을 받아 들였다. 초대 교장은 이상룡이 맡았고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여 독립군을 양성했다. 청산리와 봉오동승첩을 세우는 기초가 되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따라 불렀다. “서북으로 흑룡대원 남의 영절의 여러만만 헌원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 섬중 어린것들 품에다 품어 젖먹여 준이가 뉘뇨 우리 우리 배달의 나라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끊던 피가 우리가슴에 좔좔좔 물결치며 돈다.” 총3절의 이 노래는 황량한 이역 땅에서 전개된 투쟁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호쾌한 분위기를 살렸다고 전한다. 리듬은 미국의 작곡가 헨리워크가 작곡한 <Georgiamarch>라는 군가 겸 찬송가 선율을 차용해 만들었다고 한다.
합니하 신흥무관학교가 제1군영 이라면 백서농장은 심산 밀림고원에 세운 특별훈련대이다. 1915년부터 1919년까지 약 384명을 입영시켰다. 특별군영의 장주는 일송 김동삼이었다. 이들의 고난에 찬 훈련은 이후 항일 유격전에 큰 경험으로 쓰였다고 한다.
답사팀을 실은 버스는 일정을 앞당겨 집안시 고구려 유적지로 발길을 돌렸다. 집안시는 길림성 남쪽에 있으며 압록강과 그 지류인 통구하(通溝河)에 둘러싸인 고도 200m의 충적평야이다. 서기 3년부터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고구려의 수도이다. 고구려와 관련된 유적이 대부분인데, 산성 등이 8개소, 고분군이 30여개, 무덤은 1만3천여 기에 다다른다.
장군총 입구에 서 보니 앞으로 퉁거우 평야가 펼쳐지고 그 너머에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다.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이 무덤의 주인이 광개토대왕 인지 장수왕 인지는 모른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대형 유리조각 안에 보존돼 있었다. 설명을 하는 재중동포 김선화에 따르면 “1775자가 예서로 새겨져 있는데 140자는 판독이 불가능 하다”고 전한다. 대왕의 능을 수호 관리하는 묘지기 330호의 출신지역 명칭이 낱낱이 기록돼 있는만큼 국가의 위용이 매우 컸다고 판단될 뿐이다. 묘지기는 포로나 귀화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고구려의 위용이 자손만대까지 뻗쳐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집안시내를 통과하다 보니 국내성의 성벽 일부가 남아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이윽고 압록강에 도착했다. 강 건너 저 멀리에는 헐벗은 민둥산이 보인다. 갑자기 석주 이상룡의 <二十七日渡江> 시가 떠올랐다. “칼끝보다도 날카로운 저 삭풍이 내 살을 인정없이 도려내네. 살 도려지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애 끊어지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중략) 집을 나서서 채 한달이 못 되어 벌써 압록강을 도강하여 건너버렸네. 누구를 위해서 발길 머뭇머뭇하랴. 돌아보지 않고 호연히 나는 가리라.” 저 너머는 아직 갈 수 없는 끊어진 우리의 조국이었다. 100여 년 전 자주독립의 기치를 높이 들었지만 해방과 함께 온 외압과 분열로 지금도 자주통일의 염원만 녹아 흐르는 강이었다. 고토(古土)라는 집단적 기억에는 뿌듯했지만, 뒹굴고 있는 유적과 유물에 씁쓸해진 답사일행은 저마다의 소망을 간직한 채 압록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통하시로 다시 이동한 후 6월12일에는 백두산으로 가야 할 일정이 남아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