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걸어도 깊어지고 또 넓어진다’

문경새재 걷기 - 분잡하고 애환이 서렸던 길

2011-11-21     유경상 기자

문경새재 옛길을 걸어가자고 모인 인원은 딱 7명이었다. 11월 13일 오전 9시, 두 대의 자동차에 분승했다. 한 달에 한번이라도 올라가든 내려가든 ‘걷기’를 시작하자는 약속이 두 번째로 성사되었다. 경북북부권 일대는 그야말로 강과 산이 어린형제처럼 두 손을 꼭 잡고 노닐고 있는 터전이다. 안동인근을 보더라도 일월산과 반변천이, 청량산과 낙동강이, 소백산 언저리 봉화의 옥석산과 내성천이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지 않은가.

예천을 지나 점촌시내 영강 물줄기를 따라 저 멀리 새재를 향해 차바퀴는 굴러가고 있었다. 문경옛길박물관에서 근무하는 안태현 학예관에게 전화를 넣었다. “차 한잔 하고 가지요.”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새재 입구는 단풍철을 맞아 삼삼오오 혹은 떼를 지은 무리들로 빽빽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제 1관문인 주흘관을 지나 행렬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면 4시간에 걸쳐 3관문까지 왕복을 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천천히 걸으며 2관문을 조금 넘어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키가 큰 몇몇은 보폭이 넓어서인지 성큼 앞장을 섰다. 십 분이 지나자 앞장 선 사람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빠르게 걷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진 탓 일 것이다. 하지만 뒤에 남은 셋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걸음으로 내딛기로 했다. 명색이 슬로우시티를 지향하는 상주와 청송을 앞뒤로 한 동네에서 나들이를 왔는데 빨리 걸을 일이 아니다 라고 판단했다.

새재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자. “영남과 기호지방을 이어주는 새재. 조선시대 사람과 물자가 가장 많이 넘나들던 번잡하고 애환이 서린 길. 수많은 선비가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 길에 올랐고, 영남북부의 세곡이 이 길을 통해 충주 가흥창으로 모였다. 조선통신사가 걷던 길이다. 계립령, 죽령, 추풍령과 더불어 백두대간을 넘던 새재를 통해 전통문화와 선인의 삶을 되짚어 볼 수 있다.”

선인의 삶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건 돌조각에 새겨진 시구와 벼슬아치의 송덕비 밖에 없었다. 억지로라도 기억을 하려고 하니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의 도입대목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보부상들이 쫒고 쫒기는 장면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최근 김 작가는 소설 객주의 속편을 쓸 계획이라는 뉴스를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올 겨울 긴긴 밤에 객주를 다시 읽을 기회가 있을까? 걷는 도중 내심 작심을 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눈앞에 용추계곡이 보인다. 퇴계 이황이 용추에 대해 한시를 읊어 놓았나 보다. 큼직한 돌비석에 싯귀가 새겨져 있었다. ‘넘치고 흐르고.... 날마다 수레와 말발굽이 끊이지 않았고, 즐겁고 괴로운 일을 지켜본 이 곳.’
그리고 교귀정이다. 교귀정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 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교인처이다. 최근에 복원시킨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 정면3칸 측면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새재는 한참을 걸어도 산속이 깊어지는 곳이다. 그 넓이의 궁량이 엄청나게 크다보니 수 만명을 품어도 넉넉해지는 품이다. 오늘 같은 날 수천 명을 품고도 아랑곳없는 듯 했다. 지나고 스치는 수많은 행락객들 속에서 바로 앞서 걷고 있는 가족이 보인다. 장성한 딸을 데리고 가벼운 등산복장으로 나선 이들이 가장 단란한 모습으로 비친다. 연인과 함께 휴식을 취하는 모습은 그냥 보기에 좋다. 40대와 50대가 어울린 우리에겐 너무나 그리운 추억의 모습이다. 3관문 쪽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씩씩하게 걸어오는 전문등산객 복장의 아저씨, 앞선 할아버지와 할머니, 뒤 따라오는 젊은 연인의 다정한 모습을 번갈아 보며 우리가 서 있는 세월의 지점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자리가 오늘 같은 길에서는 단박에 가능해진다.

출발한 지 한 시간이 훨씬 넘어서고 있다. 벌써 2관문이다. 조곡관이라 불린다. 이런 템포로 걸어 3관문인 조령관 까지 걷기에는 시간이 모자란다. 선발대는 쉼터에 앉아 싸온 과일을 꺼내 먹으며 기다려주고 있었다. ‘자- 모이세요. 오늘의 흔적은 사진밖에 없습니다.’

문경의 옛 지명을 문희라고 했다.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는 뜻이었다. 영남대로 옛 과거길 부봉으로 가는 오솔길이 보인다. 저 길로 가고 싶으나 다음으로 남겨두자. 오늘은 큰길로만 걷는 것이다.

‘아이고, 배고프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작은 산장식당이 보인다. 오십대는 역시 다르다. 안주인이 싸준 김밥에 삶은 달걀, 과일이 테이블에 얹힌다. 문경에는 어딜 가도 오미자동동주가 나온다. 옆자리에는 스무 살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처자들이 식사를 하면서도 와작지껄하다. 오늘은 여기까지이다. 날씨는 추워지고 내달리듯 걷는 게 아니라 산보하듯 걷는 것이다. 한기를 몰아내는 뜨거운 라면국물에 딸기우유 빛 색깔의 동동주 한 잔으로 주마간산 본 것으로 일정을 끝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