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돌아가자.”
전쟁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 영화, <고지전>
탄탄한 배우들의 연기와 함께 올 여름 극장가 달군다
'영화는 영화다', '의형제' 등을 연달아 히트시킨 장훈 감독과 남북 관계와 그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비애를 스릴러 형식으로 그린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인정을 받았던 박상연 작가의 <고지전>이 올 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굴 전망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 투 동막골>, <포화 속으로> 등 기존의 한국 전쟁을 다룬 대작 영화가 전쟁 속의 개개인의 모습에 치중해 전쟁의 비극성을 강조했던 감정적인 영화라고 한다면, <고지전>은 감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전쟁 그 자체를 다루는 이성적인 영화다.
한국전쟁의 막바지를 향하고 있는 1953년 초 겨울,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동부전선 최전방에 있는 애록고지에 적과의 내통자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방첩대에서 근무하는 강은표 중위(신하균)가 수사를 위해 애록고지로 보내진다.
이곳에서 오래 전 사라졌던 대학 동기 김수혁(고수)과 우연하게 마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무언가 수상한 걸 느낀 강은표 중위.
하루가 멀다 하고 인민군과 고지를 놓고 자리다툼을 벌이는 병사들은 전쟁이 몸에 완전히 배인 듯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고, 이념적으로도 모호한 위치에 있는 듯하다. 이상하기는 수혁도 마찬가지다. 예전의 소심하지만 착했던 모습보다 용맹하지만 어딘가 서늘한 느낌이 강하다. 위에서는 휴전시기를 놓고 끊임없이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익숙해진 불안 속에서 병기처럼 살고 있는 악어 중대의 최전방 병사들.
<고지전>은 약간의 휴머니즘과 같은 민족끼리 벌인 전쟁의 슬픔과 비극성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임을 말한다. 고지의 주인이 수도 없이 바뀌는 와중에 한 벙커를 통해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으며 훈훈한 정을 쌓아가지만 그런 정과는 상관없이 전쟁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서로 죽이고 또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
<고지전>은 그 과정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인간 존엄성의 불씨를 향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싸움과 살상이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그것에 너무 무뎌져 버린 병사들은 반대로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한다. 끝도 없는 부딪침과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인이 바뀌는 고지를 둘러싸고 대치하는 남과 북은 이념적 대립구도를 넘어서 나라의 명령을 받고 기약 없이 죽음 앞에서 기다려야 하는 똑같은 인간으로서 서로를 대면하게 된다.
애록고지를 두고 벌어지는 전투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빼앗김과 동시에 뺏기는 고지. 더 나아질 지점을 찾을 수 없는 상황. 영화 속에서의 고지전은 휴전되기 전에 단 1 제곱미터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겠다는 것, 한 마디로 말해서 ‘땅따먹기’ 이상의 의미는 없다. 오래 싸우면서 완전히 지쳐버린 채 싸워야 하는 의미를 잃은 그들.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 쪽이나, 고지를 빼앗으려고 하는 쪽이나 더 이상 자신들이 왜 싸워야 되는지, 왜 그 고지를 지켜야하고, 왜 그 고지를 빼앗아야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누군가가 그 곳을 점령했기에 그걸 다시 뺏어야하는 것이고, 적이 쳐들어오기 때문에 지켜야한다는 것, 그게 전부다. “살아서 돌아가자.”라는 마지막에 인민군 중대장이 하는 대사는 이를 가장 잘 압축해서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얽혀 있는 이야기와 배우들의 힘 있는 연기 덕분에 <고지전>은 전장의 포화 속에서도 인간을 놓치지 않는다. 투톱인 신하균과 고수를 비롯해 신인과 베테랑을 망라한 배우들이 펼치는 호흡은 때론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때론 뜨겁게 폭발한다.
<고지전>을 통해 연기 면에서 가장 주목받을 것 같은 배우를 꼽는다면 앞서 얘기한 고수와 함께 신일영 역의 이제훈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입대해 중요한 사건을 겪으면서 변해가는 인물인 신일영은 어떻게 보면 고수가 맡은 김수혁보다 더 극심한 변화를 겪는다고 볼 수도 있다. 소년 같은 외양을 지녔지만 중대장의 직책 아래 한없이 막중한 책임감을 안게 되는 인물을 연기한 이제훈은 부드러워 보이는 외모와 상반되는 강인함,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불안과 연약함을 신인답지 않게 대담하게 그려냈다.
특히 후반부에 가서 비중이 커지면서도 선배 배우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믿음직한 활약을 했다. 그와 함께 류승수, 고창석의 인간미 가득한 코믹 연기, 순수하고 해맑아서 오히려 전쟁의 비극성을 더 상기시키는 이다윗의 연기 등이 어우러지며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 색깔만으로도 전쟁의 현장을 입체화하는 데 성공한다.
<고지전>은 반전의식, 전우애 등을 통해 전쟁영화의 전형성을 따르는 듯 하면서 자칫 지나칠 수 있을 전쟁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나름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준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것 같은 고지에 서게 되니 그들은 과연 누구와 싸우고 있었던가? 어렴풋이 보일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이 처음 만들었는데 이제는 알아서 증식하는 듯 몸집을 불려가는 전쟁이라는 행위. 논리는 물론 명분이 되었던 이념마저도 곧 무의미해지고 마는 이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은 얼마나 더 몸부림칠 수 있을 것인가. 전쟁에 잠식되어 가는 영혼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있는 <고지전>에는, 전쟁에 맞서 싸우는 인간에 대한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고 있다.